우리네 아이들과 꼭 닮은 천진난만한 시골동심
조천현의 압록·두만강 사람들① 국경선의 아이들
[94호] 2009년 01월 01일 (목)
글 사진 조천현 프리랜서 PD minjog21@minjo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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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현의 압록·두만강 사람들① 국경선의 아이들
[94호] 2009년 01월 01일 (목)
글 사진 조천현 프리랜서 PD minjog21@minjog21.com
지금까지 압록·두만강변은 단순한 변경을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이곳은 자유롭게 가볼 수 없는 북을 제한적이나마 보여주는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십여 년간 북을 취재했던 조천현 PD는 최근 몇 년 동안 압록·두만강변에 살다시피 하며 변경 사람들을 취재했다. 주로 가난하고 피폐한 사진 일색이었던 압록·두만강변의 모습은 그의 카메라를 통해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로 거듭났다. | ||||||||||||||||||||||||||||||||||||||||||||||||
“어디서 왔슴까?” 지난 10월 자강도 중강군 오수리. 학교 수업을 끝낸 3명의 여자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압록강 둑길을 따라 걷다가 강에 돌멩이를 던지며 놀고 있다. 강 건너편에서 지켜보며 사진을 찍는데도 놀라지 않고 먼저 말을 건넨다. 50여 미터 정도 되는 거리였다. “어디서 왔슴까?” “남조선!”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모르지만, “뭐라고요?”를 서너 번 반복하며 소리친다. “학교에서 끝나고 집에 가는가!” “네.” “몇 학년?” “3학년.” 인근에 학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공부하고 오는 것일까. 저 산 너머에서 걸어왔을까, 아니면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일까. 무척 궁금했다. 두만강 유역과 달리 압록강 유역 강변은 조선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드물다. 그 지역을 알만한 조선족을 찾을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조그만 마을을 향해 책가방을 메고 강둑을 걸을 때마다 도대체 어디서 공부하고 오는지 궁금증은 더해갔다. 다행히 나는 망원경 덕분에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국경선 지역의 구나 읍·리의 큰 마을에 있는 학교는 금새 알아볼 수 있지만 작은 마을의 분교는 망원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국경선의 작은 마을마다 분교라고 쓰인 학교와 유치원이 있었다. 량강도 삼지연군 농산 소학교 차가수 분교는 압록강 상류 산골마을에 있었다. 강변과는 30여 미터의 거리다. 소학교 분교 앞마당에서 노는 북녘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살림집 앞마당에서 노는 것 같다. 분교는 큰 살림집을 이용해 사용하기 때문이다. 학교 문패 옆엔 학교종이 걸려 있다. 수업을 끝낸 아이들은 분교마당에 나와 있었다. 아이들은 고무줄놀이와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다. 일곱 명쯤 모인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자유의 강산에서 노래 부르자 평화의 낙원에서 꽃피워 갈 때….”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안 일을 돕는 아이들도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텃밭에서 부모의 일손을 돕고, 여자아이들은 우물에서 물을 떠가거나 강가에 나와 빨래를 했다. 북에서는 가정을 ‘사회주의 혁명 이론의 실습장이며 생산의 최저 단위’라고 한다. 북이 어린이들에게 ‘당과 수령의 따뜻한 품속에서 자라난다’고 가르치고 있어서일까. 유치원 입구에는 ‘우리는 행복해요’라는 구호가 적혀 있고, 소학교나 중학교 입구에는 ‘김정일 원수님 고맙습니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70년대에는 북조선도 잘 살았어” 압록강변 둑을 걸으며 장난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정겨웠다.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썰매를 탄다. 발가벗고 멱을 감던 개구쟁이 아이들이 카메라를 보며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리고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들은 팬티를 입고 수영을 하고, 여학생들은 옷을 입은 채 물놀이를 한다. 몇몇은 물놀이를 끝내고 강변에 박힌 바위에 엎드려 옷을 말렸다.
수영을 하는 아이들에게 말을 걸자 모른 체하는 아이들, 쏜살같이 사라지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들은 곧바로 화답해 오기도 한다. 강 건너편에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가깝거나 중국인들의 발길이 잦은 마을일수록 아이들의 마음에는 경계심이 없었다. 한 아이가 먼저 말을 건다. 주위에서 뛰놀던 아이들도 히히거리며 물끄러미 쳐다본다. “삼촌?” “응?” “몇 살?” “열두 살” “에이, 거짓말. 이름이 뭐께?” “철수.” “어데서 삽니까?” “서울.” “뭐하러 왔슴까?” “놀러.” “지금 뭐 합니까? 밑에 있는 것 들어보시오.”
나는 몰래 사진을 찍고 있어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도 답례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보일 듯 말듯 밑으로 내려놓고 찍고 있는 나의 카메라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동행하며 길을 안내해준 조선족 김인기(62) 씨는 “우리 어릴 때 조선 아이들과 여름에는 고기잡이도 함께 하고 겨울이면 강에서 썰매도 함께 탔다. 우리는 사탕이나 사카린을 주고 조선에서는 학용품이나 명태로 바꿔 먹었다. 내 친척집이 건너편에 있어 밤에 몰래 조선으로 건너가서 극장에서 영화 보고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조선 국경마을이 중국보다 더 잘살았지.”
‘삼성 휴대폰’ 유니폼 입고 고기 잡는 아이들 두만강변 무산군의 한 농장에는 과외활동을 나온 중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열심히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뒷줄에서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몇몇 여학생은 건너편에서 카메라를 찍는 나의 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입은 옷의 모양새를 살펴보니 다양하고 색상도 밝았다. ‘짝퉁’ 유명 브랜드 스포츠용품 상표가 붙은 모자를 쓰거나 영문 글자가 표기된 옷을 입은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강가에 앉아 낚시질을 하며 ‘나이키’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 삼성 휴대폰(Samsung Mobile)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들에게 눈길을 떼지 못했다. 몇 해 전 중국 연길 시장에서 옷을 구입해 가는 북녘 아주머니도 영어가 씌어진 옷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이런 옷을 사도 되냐고 묻자 “옷에도 사상이 있습니까!”라고 면박 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옷들이 중국에서 들어간다고 한다. 학교 운동장이 없는 산골 마을 골목길에서 남자아이들이 주로 하는 놀이는 군사놀이, 숨바꼭질, 구슬치기, 제기차기다. 여자아이들은 주로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은 보지 못해 아쉬웠다. 간혹 사춘기 소년, 소녀들이 강변에 자전거를 끌고 나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도 있었다.
땅거미가 잦아들 무렵, 강가에서 불을 피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무언가 구워먹으며 고개를 파묻고 있는 아이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남쪽의 중학교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강둑 건너편 골목에서는 공차기를 하거나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엿볼 수 있었다. 놀이 시설이 없어도 6∼7명씩 어울려 노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스스로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익혀나가고 있었다. 시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동심 속에 뛰놀던 옛 모습을 발견하며 아련한 향수에 젖어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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