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제르망 백작, 그는 누구인가?

 
"나는 현재이며, 과거이며, 또한 미래이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탄생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더욱 젊고 활기차게 변해간다..."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書)-

                      ◆ 클로드 루이 드 생 제르맹 백작(Claude Louis Comte de Saint-Germain) ◆
                                유일하게 존재하는 생 제르망 백작의 초상화. (작가 미상)



'신비의 사나이" 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18세기의 모험가.

혹자는 그를 입만 살아있는 희대의 사기꾼이라 하고, 혹자는 그를 당대 최고의 신비주의자라고도 하지만, 그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바람처럼 유럽에 나타났고, 마찬가지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불로불사의 영약'과 '현자의 돌'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떠벌리며, 수많은 예언과 기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매료했다. 그는 '실제로 분명한 마법을 한번도 부리지 않고서도 마법사로 가장해 명성과 돈을 번 흥미 있는 사례'로 손꼽히기도 한다.


● 이름 ●
생 제르망 백작이 그의 본명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본인도 "이 이름은 가명이지만, 내가 생 제르맹을 자칭하는 한, 나는 어디까지나 생 제르맹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개의 가명을 번갈아가며 사용했다.

라츠코치 공, 생 마르탱 백작, 알리에 후작, 쉬르몽의 영주, 웰던 후작(밀라노에서 사용), 몬페라토 후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아이마르와 벨마르의 후작, 벨라마르 백작(베네치아에서 사용), 솔티코프 백작(제노바에서 사용), 쇠닝 기사(피사에서 사용), 차로지 백작(슈벨바흐에서 사용) 등등...


● 탄생 ●
생 제르망 백작의 정확한 출생 시기와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왔다.

첫번째는 그가 1690년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미망인과 그녀가 베이욘에서 만난 아나데로 백작이라는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스페인 왕비의 이름은 마리 드 뇌부르라고 하며, 훗날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희곡 작품『뤼 블라(Ruy Blas, 1838년)』에서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두번째는 그가 아이마르라는 이름의 유대계 포르투갈인의 아들로서 1710년에 태어났다는 설, 그리고 세번째는 그가 알자스 출신의 볼프라는 유대인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으로, 둘 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퍼뜨린 소문에 근거한다.

가장 나중에 제기된 설은 그가 1712년경에 지벤뵈르겐(Siebenbuergen)에서 트란실바니아의 대공인 프란츠 라코치 2세와 그 첫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정으로 인해 라코치 대공의 아이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감시 아래 자라나게 되었으나, 그들 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는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은 살아있어서, 메디치 가의 마지막 후손에게 맡겨져 이탈리아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기가 어릴 때 수 년간 살았고 그의 아버지가 영지를 가지고 있기도 했던 작은 마을 산 제르마노의 이름에 착안하여 생 제르맹이라는 가명을 고안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남쪽 나라의 풍경과 햇빛 비치는 궁전들을 언급했는데, 그 기억이 바로 이 시절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어릴 때 헤어진 그의 두 형제들이 각각 성 찰스와 성 엘리자베스에게서 따온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그 성인들의 성스러운 형제인 성 게르마누스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한다.

루이 15세가 그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끝까지 함구한 것이나, 백작이 자기의 비밀을 맡겼을 만한 사람들이 철석같이 비밀을 지켰던 것도, 라코치 2세와 별로 사이가 안 좋았던 오스트리아 황제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갔을 때의 결과를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밖에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출신이라던가, 헝가리 혈통이라던가, 실은 1561년에 태어났다던가 하는 설도 난무하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백작 자신이 스스로 자기 아버지는 비밀기사단원이고 어머니는 밀교의 사제라고 밝혔다고도 하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백작은 1723년에 드 장리스 부인의 어머니인 드 장리스 백작부인과 만나, 자기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자기 모친의 초상화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조그마한 그림 속의 여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는데, 백작부인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의상을 입고 있었다.

"대체 이 의상은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건가요?"

백작은 그냥 미소만 지어보이더니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35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을 살면서 유럽 역사의 여기저기에 여러 가지 신분으로 간섭했다고 믿는데,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프랜시스 베이컨,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먼드 스펜서, 몽테뉴, 로버트 버튼, 세르반테스, 발렌타인 안드레아스, 가발리 백작(Comte de Gabalis) 등이 바로 백작의 가명이라는 것이다.

장미십자회(薔薇十字會, Rosicrucians)의 전설적인 시조(始祖)인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가 바로 생 제르맹 본인이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이다.

또다른 황당무계한 주장에 따르면 그는 5만 년 전에 지금의 사하라 사막이 있는 곳에 번창했던 초고대 문명의 통치자로 태어났는데, 서서히 육욕(肉慾)에 물들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절망하여 그 낙원을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이후 아틀란티스의 대사제, 선지자 사무엘, 예수의 아버지 요셉, 로마에서 순교한 성자 알반(Alban), 플라톤 학파의 철학자 프로클루스, 캐멀롯의 마법사 멀린, 로저 베이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생 제르맹 백작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역사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 중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서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스웨덴의 신비철학자이자 기술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가 그의 또다른 모습이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 방랑 ●
이러한 추측보다 더욱 오래되고 신비로운 이야기가 바로 '방랑하는 유대인'에 관한 전설이다.
이 전설은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동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것을 유럽에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는 카타필루스(Cartaphilus)라는 유대인 문지기가 있었는데, 그는 나사렛 예수가 재판을 받을 때에도 참석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 고행의 길을 걸어가다가 지쳐서 잠시 쉬려고 멈춰섰을 때, 길 옆에 늘어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속에서 카타필루스가 뛰쳐나와 예수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예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자네는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예수를 처형장으로 끌고 가던 로마 병사들이 카타필루스를 군중들 쪽으로 다시 밀어넣었고, 예수는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타필루스는 자칭 메시아라는 사내가 자기에게 내뱉은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십수년 후, 친구들은 모두 늙어 죽어가는데도 자기 혼자 더이상 나이를 먹지 않게 되자, 그 유대인 문지기는 예수의 말을 기억해 내고 전율에 온몸을 떨었다.

그는 결국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성직자들은 이런 이야기가 단순히 종교적인 농담에 불과하다며 무시했고, 급기야 이 이야기는 예수를 자기들이 기다리던 구세주가 아니라며 내쳐버린 유대인들이 그 벌로써 나라를 잃고 방랑하게 된 역사를 비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설은 중세를 거치면서 유럽의 민담 속에 편입되어,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13세기에 동방에 갔다온 많은 여행자들이 자기가 카타필루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비슷한 보고가 줄을 지었다.

그리고 각각의 조우(遭遇)는 점점 서유럽과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던 1740년의 어느 날, 검은 비단옷을 입은 무명의 신사가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생 제르맹 백작이라고 칭했다.

그의 특이한 언행과 값비싼 장신구는 파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잘생긴 용모에서 풍겨나오는 유대계의 특징을 보고, 미신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은 그야말로 방랑하는 유대인 카타필루스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어느 독일 장군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파리의 사교계에 드나들게 되었다.


● 인물 ●
생 제르맹 백작은 '중간 정도의 키에, 탄탄하게 단련된 몸매를 지녔고, 놀랄 만큼 간소하게 차려입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드 오세 부인(Madame de Hausset)이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방문하는 그의 모습을 묘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섬세하고도 재치있는 태도를 가졌으며, 매우 단순하지만 고상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는 또한 정교하게 제작된 담뱃갑과 시계를 가지고 다녔다.
눈은 크고 갈색, 머리는 까만 밤색이고 치렁치렁하며, 신장은 170센티 전후, 얼굴이 긴 편으로 곧게 뻗은 콧등은 고귀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희미한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있다. 목소리는 맑고 명쾌했다.
그는 아무리 높은 사람을 만나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높이는 식의 화법을 사용했다.
자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고, 자신감에 가득찬 어조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는 아담하고 날씬한 체구와, 온화하고 우아한 몸가짐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미소를 지을 줄 알았고, 특출나게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데마르 백작부인도 "오, 세상에나! 태어나서 이제까지 그처럼 멋진 눈동자는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 친교 ●
유럽 각국의 귀족들이 오컬트나 연금술, 비밀결사, 마법 등의 화제에 몰두하던 시절에, 불로불사의 영약을 지니고 있으며 마음대로 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소문난 이 희한한 남자는 세인들의 끊임없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냉소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점성술에 대해 흥미를 보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기에 절대로 안 죽는 사내가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프랑스의 미라보 백작은 여기에 덧붙여 "그는 언제나 조심성없이 굴더니만, 결국 자기의 선대(先代)들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마저 까먹은 모양이다."라고 비꼬았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나 장 자크 루소와도 친분이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그와의 친교로 인해 궁정의 질투를 불러일으킨 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는 백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희한한 인물에 대한 소문을 듣고 흥미를 느껴, 사람을 보내서 그의 소재를 알아내고는, 그를 궁전으로 초대했다. 백작은 초대를 받아들여 왕을 방문했고, 탁월한 언변으로 왕과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당시 왕은 백작과 후작부인과 셋이서 방에 틀어박혀 대화를 나누느라 저녁 내내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드 오세 부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왕은 생 제르맹이 상당히 고귀한 출생 배경을 가진 것처럼 말했다고 한다.
카를 폰 헤세 카셀 백작(혹은 헤센의 카셀 영주, 카를 폰 헤세 대공) 또한 생 제르맹과 인연이 깊은 인물인데, 그는 여러 해 동안 백작과 함께 연금술 실험(흑마술이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을 해 왔고, 백작은 그를 동등한 친구로서 대했다.
생 제르맹이 1784년에 (공식적으로) 세상을 뜨기 전에 자기의 서류들을 맡긴 것도 헤세 카셀 백작이었다.
하지만 루이 15세도 헤세 카셀 백작도 생 제르맹의 출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실도 밝힌 바가 없다.
백작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이 늘상 빠지게 마련인 엄숙주의의 함정에 말려들지 않고 자유로운 개성을 유지했다.
그는 당대의 어여쁜 여인들과 어울리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다.
비록 그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지만, 순전히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과 나누는 대화를 즐기기 위해 외식 자리에 끼여들곤 했다.
그는 어떤 신분의 사람 앞에서도 절대로 기죽지 않는 귀족적인 품성을 지녔으며 심지어는 각국의 왕족들과도 동등하게 지냈다. 그는 피부의 주름을 없애거나 흰머리를 염색하는 비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그는 또한 엄청나게 다양한 이야기로 좌중을 열광케 만드는 재주도 갖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자기과시욕이 강한 현학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는 진술도 전해진다.
제라르 드 네르발의 『깨달은 자들』은 백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시의 회고록들에 의하면, (그는) 사기꾼에게나 어울리는 뻔뻔스러움도 없었고 광신자에게 필요한 유창한 언변도 없었으며 피상적인 사람들을 이끄는 유혹도 없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생 제르맹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로,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충실하려고 하며 회원들이 좋은 평판을 받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던 (프리메이슨, Freemasonry) 교단을 오히려 신비스럽게만 만들 뿐이었다.'
폰 글라이헨 남작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파리에서 명망있는 기사인 랑베르의 집에 머물며 그 딸인 마드무아젤 랑베르의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로슬리의 회상록에는 백작이 네덜란드에서 자기 자신만큼이나 부유하고 수수께끼에 싸인 어느 귀부인과 사귀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이에 따르면, 백작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이 부인 또한 백작과 함께 여러 차례 다른 시기에 목격되었으나, 남편과 마찬가지로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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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OHIS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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