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군인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끊는 가마에 넣어 죽이기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일본이 본격적인 침략에 나서며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는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군대 내에 위안소를 만들고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데려다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했다.
전쟁 내내 위안부를 운영하며 성노예로 여성을 부려먹던 일본 군인.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쯤 식량보급이 중단되자 상상조차 힘든 일을 벌였다.
자신들이 성노예로 부려먹던 조선인 위안부를 총창으로 찔러죽이고 일본도로 토막내 나눠먹은 것.
믿기 힘든 이 이야기는 지난 2005년 북한 노동신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노동신문은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두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만고의 죄악이었다"며
"일제의 죄악의 역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덮어버릴 수 없으며
일본은 그에 대한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고 이 행위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일제가 식인 행위를 했다는 것은 북한의 희생자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38년 17살 나이에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중국 난징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박 할머니는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고 말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던 박 할머니는 그릇을 깨끗이 비웠고,
그 모습을 본 일본 군인들은 껄껄 웃으며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다"고 조롱했다는 것이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폭로한 일제시대 일본군의 만행은 도저히 인간의 행동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광기 그 자체다.
위안부 여성들을 성노예뿐만 아니라 인체 실험 및 식인의 대상으로 삼은 일본의 만행은 절대 잊어서는 안될 역사다.
김현주 2018.09.22
뉴스팀 news@segye.com
"日軍 조선처녀로 고기국 만들어 먹여"
기사입력 2005-04-27
北 생존 위안부 박영심 할머니 증언
(서울=연합뉴스) 문성규 기자 = "요구에 응하지 않은 조선처녀를 죽여
가마솥에 넣어 끓인 뒤 그것을 고깃국이라고 속여 먹였습니다."
북한에 생존해 있는 한 위안부 할머니가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을 증언,
다시 한번 일제의 잔혹성을 일깨우고 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7일
`일본을 고발한다-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이라는 연재물의
첫 번째 순서로 박영심(83) 할머니의 사연을 소개했다.
박 할머니는 체험담에서 "일본놈들이 어느날 `너희들이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고깃국을 대접하겠다'면서 고깃국을 주었다"면서 "영문도 모르고 다 먹었더니
놈들은 그 고깃국이 `조선처녀의 고기로 만든 국'이라며 껄껄 웃어댔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일본군은) 저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처녀를 죽여
가마에 넣어 끓였다고 했다"며 "일본놈들은 정말로 짐승같은 놈"이라며 치를 떨었다.
그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꽃다운 나이인 17살 때(1938년).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탄광 인부로 일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살 때 평안남도 남포시 후포동의 한 양복점의 식모로 팔려나갔다.
그러던 1938년 3월경 일본순사가 나타나 "좋은 일자리가 있으니 소개해 주겠다"고 해
"부모님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저항했으나 다짜고짜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데려 갔다.
그 곳은 중국 난징(南京)이었다.
난징에는 일본군 병영들이 많았으며 그 병영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금수로 위안소'가 있었다.
위안소는 3층으로 된 벽돌집이었으며 각 방의 크기는 가로 세로 2X2.5m로 방에는 침대가 하나씩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소름이 끼쳤으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잠시 후 일본군인이 방에 들어와서야 무엇을 당하는가를 알아차렸으나 절대로 응하지 못하겠다고 저항했다.
그러자 마구 때리고 차면서 마지막에는 긴 칼을 뽑아 목에 들이대고 "이래도 응하지 못하는가"라고 위협했다.
그 날부터 하루에 일본군인 30여명을 대상으로 `성봉사'를 해야만 했으며,
하도 힘들어서 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로 때리고 차고 때로는 칼로 찌르기도 하면서 그들의 수욕(獸慾)을 채웠다.
박 할머니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 아편을 먹고 견뎌보려고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죽을래야 죽을 수 없고 살래야 살 수도 없어 정말로 기가 막혔다"고 당시의 기구했던 운명을 술회했다.
조선신보는 박 할머니가 중국 내의 여러 위안소에 끌려다니다가 광복을 맞아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며 그후 박 할머니는 자궁을 들어낸 데다
심장판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박 할머니는 지금도 한밤중에 그때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며
"원한을 풀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절규했다고 조선신보는 덧붙였다.
북 생존 위안부 할머니 박영심
moonsk@yna.co.kr (끝)<저 작 권 자(c)연 합 뉴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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