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관혼상제 문화를 둘러싼 세대간의 갈등이 심각하다. 특히 제사 문제를 놓고 가족간에 분란이 잦다.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지난해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중·고생 20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청소년 가치관 국제비교 조사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65.5%로 전년과 비교해 1.5% 감소했다. 주변 국가와 비교해도 중국은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응답이 89.7%, 일본은 74.9%로 우리나라와 10%포인트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제사에 관한 한 우리 청소년들의 인식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제사 못받을 생각에 서글퍼”
김성훈(65·부산 금정구)씨는 앞으로 자신이 죽어도 제사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탄한다. 독자인 아들이 며느리를 따라 기독교로 종교를 바꿨기 때문이다. 지난해 추석 때는 며느리와 아들이 제사를 지켜 보기는 하되 절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말싸움까지 벌였다. 올 설에는 아들 부부가 본가를 찾아 오지도 않았다. 김씨는 “지금까지 어려운 사정에서도 제사를 꼬박꼬박 지냈는데 내가 죽어서 제사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프다.”고 토로했다.
자식들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제사상을 통째로 주문하는 바람에 부모와 마찰을 빚는 사례도 흔하다. 김신영(75·서울 광진구)씨는 “요새는 제사상을 주문하는 집안도 있다는 주변 사람의 얘기를 들었는데 내가 그 경우에 해당될지는 꿈에도 몰랐다.”면서 “제사는 정성으로 모셔야 하는데 자식들이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한탄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죽은 뒤 자식들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매년 명절이 다가오면 15만원가량 하는 제사상을 미리 주문한다. 문화적 충격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경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제사상을 차릴 능력도 없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상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지면서 농촌에 남아 자식이 돌보지 않는 조상 묘 관리를 모두 떠맡는 노인도 늘어나고 있다. 농사를 짓는 최영식(68·경북 안동)씨는 5대조(代祖)의 묘관리를 혼자 담당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아들 둘은 묘를 관리할 시간이 없다며 일꾼을 사서 관리하거나 화장해서 가족납골당으로 바꾸자고 말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고 반대했다. 최씨는 “기력이 있을 때까지는 어떻게 풀이라도 뽑아 주겠지만 내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어떤 조상인지도 모르는 묘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면서 “내 묘만이라도 잘 관리해 주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로 풀이 무성할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그는 “요새는 아들들의 말대로 돈을 주고 일꾼을 사서 관리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고 덧붙였다.
●설·추석에다 12번 기제사… 종손 부부 이혼도장
제사로 인한 갈등이 커져 이혼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가는 가정도 있다. 부산에 거주하는 종손 김모(53)씨는 아내 이모(48)씨가 시댁 제사를 잘 모시지 않고 시댁에 자주 찾아가지 않는 등 살림을 등한시한다고 여겨 2006년 초부터 별거한 뒤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명절 제사 외에 12번의 기제사가 갈등의 발단이 됐다. 김씨는 아내가 명절 때만 잠시 들러 제사를 지내고는 곧바로 친정으로 돌아갔으며, 그 외에는 제수 마련 등 제사 준비를 제대로 거들지 않았다고 주장해 지난해 9월 부산지법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자식과 마찰 피하려 횟수 줄이고 음식 주문”
같은 5080세대라도 제례에 대한 시각차는 있다. 여가생활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청년층과 마찬가지로 제사를 불편한 존재로 바라보는 중노년층도 많다. 최숙영(55·여·경북 구미)씨는 기제사가 다가오거나 명절 때만 되면 신경이 곤두 선다. 일을 하기 싫은 것도, 번거로운 것도 아니지만 시어머니와 사사건건 부딪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만석꾼 집안의 고명딸로 ‘손이 크다’. 제사나 명절 땐 꼭 옛날식으로 음식을 넉넉하게 해 마을 사람들에게 돌려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고도 음식이 남아 냉동실에 다음해까지 쌓여 두는 일도 있었다. 그는 “요즘 일일이 음식 돌리는 집이 어디 있나. 20년 넘게 모셔 왔지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자식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제사 횟수를 줄이거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주문하는 노인도 있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미리 자식이나 며느리와 타협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경기침체로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자식이나 며느리를 배려하는 가정이 많아졌다.
이정식(67·서울 마포구)씨는 적어도 한달에 한번 제사를 지내는 종갓집 독자다. 4대 독자인 그의 아들이 2년 전 결혼할 때 이씨의 아내는 “이제 제사에서 해방됐다.”며 좋아했지만 이씨는 며느리 걱정이 앞섰다. 몸도 약한데 직장까지 다니는 며느리가 수많은 제사를 챙기다가 병이 나지는 않을지 염려됐기 때문이다. 시집온 지 석달된 이씨의 며느리는 지난해 증조부 제삿날, 갑자기 코피를 흘려 이씨를 놀라게 했다. 그 뒤 이씨는 제사를 대폭 간소화하기로 결심했다. ‘나 고생할 땐 눈깜짝 안 하더니 며느리 코피 흘린 게 대수냐.’며 아내가 눈을 흘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사 음식 가짓수를 줄이거나 일부는 시장에서 구입하는 방법으로 며느리 일거리를 줄여 줬다. 이씨는 “겉치레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야겠지만 앞으로 편의를 위해 절차를 더 간소화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맞벌이 며느리 늘면서 배려하는 시댁 많아져
조영선(68·여·경기 수원)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같이 살지 않는 조씨의 며느리는 1년에 8번이나 되는 기제사 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와 제사상 차리는 것을 돕는다. 그는 회사에 다니는 며느리가 바쁜 와중에도 매번 내려오는 것을 기특하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며느리가 아들에게 몰래 “힘들다.”고 푸념하는 것을 엿듣는 순간 힘이 쭉 빠졌다. 그는 “며느리가 이제는 아이들도 다 크고 편하게 지내야 하는데 우리 때처럼 힘들게 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나물과 생선, 전처럼 꼭 해야 하는 것 외에는 주문해서 검소하게 차리는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용 이민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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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문제가 가족간 종교갈등 주원인
2007년 6월 18일(월) 오후 3:24 [문화일보]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종교다원 사회다.
송 교수가 발표한 사례에 따르면 K(58)씨는 1년에 6차례 돌아오는 제사와 명절 때마다 죽을 맛이다. 동생들로부터 형제 간의 의를 끊거나 아니면 형수와 헤어지라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제사때에 오시는 조상님
어느날, 열두시가 다되어 문을 닫을려고 준비를 하고 계셨답니다.
이 사람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며칠이냐고 묻더랍니다.
마음으로 고하시던지, 축문을 읽으시던지 간에 '우리 자손들이 바빠서 다음부터는 제사를 좀 당길테니까 그때 오시라고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는 겁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실제로 오시는 겁니다. 그러니 정성으로 모셔야합니다.
추석날 집에 오신 조상님들
1996년도 대학교 1학년 추석명절을 맞아 시골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저의 친척들 대부분이 기독교를 신앙하는 터라 명절날 모이더라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예배로 제사를 대신하였지요.
증산도에 입도한 후 제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추석 아침 친척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시간 내내 조상님께 죄송스러워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친척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책을 읽을 때 저는 후손이 되어서 조상님께 제사를 못 지내드려 너무나 죄송하다고, 이 못난 자손들을 용서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간에 각자 개인 기도시간이 있었습니다. 마침 분위기가 조용해졌기에 집중하여 속으로 태을주를 외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을주를 읽고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이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순간 ‘저 분들이 우리 조상님들 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분은 마당에 서계셨고 또 한분은 마루에 서계셨고 나머지 한분은 안방으로 들어오셔서 앉으셨습니다. 안방으로 들어오신 분은 제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증조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으나 마루에 서서 화를 내시는 분이 증조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는 방안에 앉아서 기도하는 친척들을 바라보시며 얼굴까지 붉어지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제사를 안 지내는 후손들을 꾸짖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당에 서계신 분은 고조할아버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조할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한숨을 쉬시고 혀끝을 차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더니 잠시 후 대문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증조할아버지께서 따라 나가셨고, 친할아버지는 좀 더 있다가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가는 모습 같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친척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 저는 큰아버지께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화를 잘 내시고 무서운 분이셨죠?”
맞다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래서 또 물어보았습니다.
“고조할아버지는 인자하신 모습에 키도 크시고 풍채가 좋으시고 청색 도포를 즐겨 입으셨구요?”
큰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떻게 그렇게도 딱 맞게 잘 아냐며 신기해하셨습니다.
이날 체험으로 명절이 되면 조상님들은 자손을 보기 위해 직접 찾아오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제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를 지내드리지 못해 너무도 죄송스러웠습니다.
(월간개벽 2004년 4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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