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덕의 생애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출신이다. 1950년 10대 후반의 나이에 성석근과 결혼했으나,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이 지역을 점령했을 때 도왔던 남편이 대한민국 국군을 피해 조선인민유격대에 입대하면서 결혼 몇 달만에 헤어지게 되었다.

1951년 2월에 남편을 찾아 겨울옷을 챙겨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20여 일 동안 같이 지낸 끝에 성석근이 사망하자 유격대에 합류하여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남성대원인 이홍이와 함께 1963년까지 체포되지 않아 '마지막 빨치산'이 되었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에 생가 근처인 지리산 내원골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함께 있던 이홍이는 사살되었다. 체포 당시 총상을 입은 다리를 절단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5년 석방되었다. 수감 기간은 약 23년이며 이 기간 중 전향했다. 석방 후에는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서울 관악구의 만남의 집에서 살림을 맡았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라 그때까지 비전향으로 남아 있던 장기수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될 때 정순택 등과 함께 양심 선언을 했다. 정순덕은 자신의 전향은 고문과 강요가 동반된 전향 공작에 따라 전향서에 강제로 도장을 찍은데 불과했다고 주장했으며, 전향을 취소하고 북조선으로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향이 경남 지역이고 전향서를 쓴 적이 있다는 이유로 송환은 성사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가 2004년 인천에서 사망했다.




남부군

지리산 조개골 내원골 일대는 빨치산 최후의 항전처. 빨치산 전용 방앗간이 있을 규모의 중요 거점.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로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다.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지리산 반란의 역사도 정순덕 여인 체포로 막을 내렸다.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국군은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항쟁 진압 거부했다가 반란군이 되어 지리산 문수골로 쫓기며 남부군이 되었다. 그들을 진압하려 군경연합으로 지리산에 투입된 토벌군과 삶의 터전 떠날 수 없던 지리산 주민들은 그 틈에서 방황했었다.

지리산 남부군 완전 소탕이 공식 선포된 시기는 1955년 5월 23일. 그 이전까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에 살았던 주민들. 밤낮으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에 살았던 지리산 자락 주민들의 고초.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되었다.

1949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 여 명 사망.
좌익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에 수용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은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서 총살.
1951년 '산청 함양 주민 대학살사건'은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자세한 사연조차 알 수 없는 사건들.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산골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한 사건.
1951. 3. 12.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에서 500 명 주민.

토벌군에 의해 총살 당한 지리산 자락의 산골 주민들이 겪은 참상. 남부군에 의해 숨진 주민들 참상은 밝혀진 바 없지만 비슷했을 듯.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그들은 남북의 사상전 소용돌이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을 떠돌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총맞아 죽고, 얼어 죽었다.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였다. 

그녀는 어찌하다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었을까?
여자 몸으로 무슨 사연이 있어 남부군이 되었을까 하여, 그녀의 진술기록을 어렵게 찾아 내용을 소개한다.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정순덕 여인의 진술 내용을 읽다가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내원골은 남부군 정순덕 여인의 관광 코스. 13년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이 버틴 "내원골"

17 살 신랑은 결혼 직후 6.25가 터지자 공산군 수중에서 부역.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피했고 신혼 새색씨 그녀는 그해 겨울 밤,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6 살 어린 신부에겐 가시밭길 인생 역경이 시작된다. 지리산에서 남편과 함께 지낸지 불과 20 여일 만에 다시 헤어진다. 내원골 안내원 마을엔 그녀가 살았던 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그녀가 태어나 남부군이 되어 붙잡힌 순간까지의 마지막 활동무대이다. 


정순덕 연표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한, 정순덕 여인.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7세 성석조씨와 16세에 결혼.
1950년 결혼 직후 6. 25 동란에 공산당에게 남편은 6개월간 부역.
1951년 1.4 후퇴 후 국군이 탈환하자 남편 따라 지리산에 들어감.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1952년 남편 전사).
1953년 남부군 노영호 부대에 편입하여 거점을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산청군 내원골에서 국사봉 거점으로 남부군 활동 중 체포.
1963년 11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단.

1985년 8월 15일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후 가석방.
1988년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하기 위해서 나옴.
1995년까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 만남의 집 ’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 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했지만 무산되었다.
2004년 4월 1일 운명후 통일로 길목인 파주 보광사에서 영결식.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16세 새색시, 18세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정순덕 비화

1933년 지리산 첩첩산중 산청군 삼장면 출생. 아홉 식구가 통나무로 엮어 만든 황토집에서, 산비탈 위에 논밭 화전을 일구면서 살았다.

약초 산나물을 캐며 자란 선머슴.,소녀. 열여섯 살 되던 해, 아랫 담에 사는 한 살 위 총각과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의 품에서 자란 남편. 혼례 때 연지곤지 분단장해 본 것이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화장이었다.

동네 아낙들은 열여섯, 열일곱 소꿉 부부에게 ‘키다리 신랑과 콩각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신랑은 피부가 가무잡잡하면서 키가 멀쑥하게 컸고, 신부는 콩처럼 작았지만 단단하고 야무졌던가 보다.

그들은 가난했어도 아기 사슴처럼 풋풋했다. 그들이 결혼한지 채 두 달도 안 되었을 무렵. 난리가 터졌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인민군들이 산골 마을로 들어왔다. 철부지 신랑은 지주 소작인이 따로 없는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말에 신이 나서 두어 달 동안 열심히 부역에 참여했다.

"남편은 까막눈인데다가 천애고아나 다름없었지.
그 같은 그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걸 깨우쳐줄 만한 친척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정순덕 -”

인민군이 퇴각하자 신랑은 각시에게 “짧은 말을 남긴채 훌쩍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제 지리산으로 들어가야 될끼다.
당분간인께네 너무 걱정 안 해도 될끼다.
그라이 할무이 모시고 쪼끔만 참고 있어라이"

남편이 떠난 얼마 후 국군과 경찰이 다시 마을로 들어왔고, 그녀는 빨갱이 각시’죄목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미 칠순이 넘은 그녀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구술했다.

"고문이 한두 번으로 끝났던 게 아니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라며
참나무 몽둥이로 무차별 타격을 가하는데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할까도 했었지.

아마 그 때가 11월 달이었을 거야.
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끌려가
남명 선생 묘비석에 꽁꽁 묶이게 되었어.

결국은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차라리 남편 곁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뿐.
밤새도록 용을 쓴 덕분에 포승줄이 풀려
무작정 산줄기를 타고 산으로 올라갔었지."

그녀의 입산 동기는 이처럼 단순했었다. 좌익 우익이니 하는 사상 따윈 알지 못했다.
오직 신랑을 한 번 더 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신랑이 있는 지리산으로 올라갔다는 그녀.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믿었고,
입산 자체가 죄가 된다는 생각을 그녀 자신은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 빨치산이 되었다.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려던 이 어린 신부는 스스로 생각지도 않은 무장공비가 된 것이다. 
 

끔찍이 길고 긴 지리산의 겨울, 허리께까지 쌓인 눈더미 속에서 허기를 이기며 열세 번의 겨울나기.

비좁은 토굴 속에서 어떻게든 동상에 걸리지 않으려고
눈을 뭉쳐 그것으로 맨살을 문지르던 악몽 같았던 시간들.
13년간 사계절, 일년 열두 달 내내 옷 한 벌로 지냈던 그녀.
 
그녀는 입산한 뒤 간병부 일을 했다.
그러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그때 비로소 캘빈 총의 장전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는 정치 학습까지 받게 되었다.

만일 그때 그 길을 택하지 않고 하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귀순을 하였다면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이 과연, 보장될 수 있었을까?

오랜 산 생활은 그녀를 야수처럼 만들었다. 온몸에 털이 나고 산짐승같이 변모해 갔다.
표범처럼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앉아 마치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그런 자세
숨소리 조차 내뱉지 않는 으시시한 모습.

식량을 구하기 위해 친척 집에 들렀다가 잠복해 있던 경찰에 의해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붙잡혀 산 속 생활을 마감.  그녀는 오른쪽 대퇴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치료한다면 치료 기간이 길어져서 빠른 수사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뒷말도 무성했다.

그후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 수감.
그리고 살아서는 나가지 않겠다던 독한 마음을 바꿔 1985년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8・15특사로 가석방.

막상 출소했으나 불구된 몸을 의탁할 데는 없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경찰관이 소원이었던 남동생
연좌제(緣坐制)에 묶여 그 꿈을 접어야 했고 그후 그녀와 등을 돌리고 이미 의절한 상태.

그녀는 23년간 옥살이를 하고나서 1985년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갔었다.
노파가 되어 다리를 절룩이며 지팡이를 짚고 찾아온 그녀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제집 현관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후에야 저마다 한마디씩 욕을 해대는 것이었다.

"가랑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
"낯짝 두껍기도 하지."
"무슨 염치로 고개 들고 찾아왔담."” “
"천벌을 받아도 싸지, 싸-."” 

그동안 23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런데도 그때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
마을 사람들에게 끼친 그 숱한 피해들, 심지어 일가족 사살 만행도 저질렀으니.,

그러니, 고향이라고 한들 누가 그녀를 반겨 주겠는가? 미움과 원망은 내원사 골짜기보다 깊게 패여 있었다.
남은 가족과 고향에서 조차 버림 받았던 정순덕 여인

그래도, 그녀를 보살펴주던 이가 있었다. 이십여 년의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한결같이 그녀의 옥바라지를 해준 장로 한 분이 계셨었다. 한동안 그댁에서 머물렀고 고맙게도 의족까지 해주었다.

그후 그녀는 정 카타리나 세례명으로 거듭 태어났고 음성군에 있는 꽃동네에 가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녀는 칠순 나이에 꽃동네에서 나와 비전향 장기수들의 살림을 도맡기도 했었다. 출소한 비전향 장기수들이 모여사는 만남의 집

그러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좌반신까지 마비된., 그녀.
그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몸은 오른팔 뿐.오른발 의족 마저 쓸모 없게 되어버린.,그 녀.
'그녀는 병상에 누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출처 :  인터넷

Posted by NOHIS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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