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 2,000건을 수집 연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上 下』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제1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 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무세살의 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 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 "비야"로서의 전생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살 반쯤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 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 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8년, 그녀가 열살 때,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아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 가(家)의 비야에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는 스완라타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 때 화장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 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 명의 아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 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 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바브랫드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 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 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 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 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 가를 방문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 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 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 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프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 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 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때에는 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 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가?"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챠타파푸울의 미슈러 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기 직전에 있던 곳인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 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 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다.(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 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대한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 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 주에 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아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 때에 부르는 노래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 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수 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 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 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 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의 카무렛슈라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 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스완라타가 열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 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이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조건인 것입니다."
제2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틀거린 것이다. 그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 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 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 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시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고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계급제가 엄연히 지켜지고 있는 인도에서는 최상급인 바라문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 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 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의 배수로가 잇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 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 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 어머니!"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 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했다. 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
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의 차기 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 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 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 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낙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 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 구획이 많이 나 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 라르 가(家)에서 데리러 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에 숨으라고 말했다
제3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에서 남쪽으로 약 150㎞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 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 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 데에 대해 부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 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브[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의 세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 프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 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 했는지도 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 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 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아마넌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 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 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 것 등도 전인격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쯤 떨어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 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하나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 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 말하였다. 그는 방 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 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4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가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가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 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 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프라카슈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 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 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 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 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 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 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 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5년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 가르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로 그 광경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의 손을 잡았다. "비르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 향해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르마는 실은 니르말의 또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 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이 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그리고 열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 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코시카란으로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의 거리로 복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 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 만난 코시카란은 여러 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 중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 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 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알아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 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5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세살 때부터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할 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 싶다"고 하며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으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 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 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 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 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 샹카는 첫대면인 프라셔드 씨를 자기의 아버지로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 믄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 전의 일이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프라셔드 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수사를 청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다가 거기에서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 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 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제6화. 전생의 남편을 섬기는 스크라.
캘커타에서 약 60㎞ 떨어져서 캄바라 마을이 있다. 스크라는 1954년 3월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겨우 한살 반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가 목침만한 나무토막을 집어서 껴안고는 "미누, 미누"하며 마치 아기를 달래듯 어루는 것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베개나 나무토막을 보면 꼭 그것을 껴안고 "미누, 미누" 하였다. 그러더니 차츰 말을 익히게 되자 전생의 일을 자세히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트파라 마을의 라사라라는 지역에서 "그 사람"과 케토우, 카르나와 함께 살았으며 미누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영화구경을 갔다 오는 길에 맛있는 요리를 먹은 이야기도 했다. 그러더니 아버지에게 바트파라에 데리고 가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혼자서도 갈 수 있다. 길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크라의 아버지 K.N.센 구프라는 철도원이어서 딸아이가 이야기하는 바트파라를 열차를 타고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캘커타에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바트파라가 실제로 있는 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바트파라 가까이에 사는 직장 동료인 파르에게 스크라가 하는 말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파르는 바트파라 마을에 그의 친척이 있다고 하면서 라사라라는 지역이 있는지 또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파르의 회답을 받고 구프라는 스크라를 데리고 바트파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 회답은 이러했다.
"바트파라 마을에는 분명히 케토우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조카 중에는 미누라는 아이가 있다. 미누의 어머니 마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죽었다. 1948년 1월의 일이다. 그 집 주인은 아므리타랄 차크라바트리라고 하는 바라문계급이다."
이 회답의 내용에 따라 스크라를 미누의 어머니로 가정해 보면 꼭 들어맞는 것이다.
이리하여 스크라가 다섯살이 되던 1959년 여름에 파르의 친척이 주선을 하여 바트파라에 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차크라 바트리 가에도 알렸다. 스크라의 아버지 구프타 일행은 버스에서 내려서 스크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교차로가 많고 사잇길이 많아 복잡한 길인데도 조금도 헤매는 기색이 없이 전생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서는 마나의 시아버지를 알아보았다. 집안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전생의 남편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미누의 삼촌인 케토우와 카르나도 알아보았다. 딸 미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축제용 수레인 라스를 넣어두는 건물이 있는 것도 지적해냈다. 라스를 두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라사라"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스크라의 전생기억에서 특이한 점은, 결혼하여 지낸 수년 동안을 제외하고는, 마나가 그 생애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친정 식구들을 거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가족은 물론이고 그 집을 방문하여서도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 첫방문 이후에도 스크라는 바트파라 마을을 자주 방문하였고, 그녀의 전생기억도 많이 나타났다. 한번은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면서 그것을 만들어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리고 식사 때에 마나의 남편인 하리단과 함께 먹게 되면 언제나 그가 남긴 것을 그대로 먹곤 했다. 인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이 먹고 남은 음식을 먹는 것이 부부간의 정법(定法)인 것이다. 스크라의, 딸 미누에게 대한 애정은 무척 커서 미누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와했다. 또 스크라는 많은 옷을 넣어둔 옷상자 속에서 마나가 사용하던 세 벌의 옷을 골라내었다. 마나가 쓰던 재봉틀을 보자 반가운 듯이 만지며 눈물을 머금었다. 그 재봉틀은 마나 생전에 열심히 일하던 것이다.
스크라의 전생기억은 세살에서 일곱살 사이에 가장 또렷하였고, 그 이후로는 차츰 희미해져갔다. 전생기억이 흐려짐에 따라서 하리단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도 차츰 냉담해졌다. 그래도 그녀가 열두살쯤 될 때까지는 하리단의 방문을 환영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어린 소녀가 전생의 남편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열다섯살 때에는 재혼한 하리단이 그의 아내와 함께 왔다 간 뒤에 "저 사람들이 자꾸 가까이 오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열일곱살이 되자 전생기억을 상실한 것 같다고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말하고 있다.
제7화. 전생의 가정에 애착을 가진 마릭카.
인도의 베로레 시(市)에 살던 "데비"라는 처녀는 1949년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녀의 언니 곧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남편과 함께 폰테이세리에 살고 있었다.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서는 1956년 7월 집의 아래층을 세를 놓았다. 이 일층에 세든 사람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친척으로 그 집에는 1955년 12월 4일생인 딸 마릭카가 있었다.
마릭카는 자라면서 위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강한 애착을 보이게 되었다. 그녀가 네살이 채 되기 전에, 처음으로 윗층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집에 놀러왔다가 거기서 의자 위에 있는 수놓은 쿳션을 보더니, 그것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만들었어"라고 하는 것이었다. 모우로가시마니의 아내는, 그것은 여동생인 데비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10년도 더 전에 죽은 여자가 만든 거야"라고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러자 마릭카는 고개를 저으며 "그 여자가 바로 나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또 그녀는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에게 처음에는 "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동생의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우로가시가마니의 아내는 "아주머니라고 불러라" 하고 마릭카에게 가르쳐 주었다. 마릭카는 이 "언니"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해지고 기회만 있으면 "윗층집"에 올라와 놀면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이 "언니"와 함께 있으려고 했다.
이 "언니"는 마릭카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죽은 데비와의 유사점을 많이 발견했다. 목욕하는 방법이나 당황했을 때의 몸짓 같은 것도 닮았으며, 남의 앞에서 좀 거만하게 걷는 걸음걸이도 닮았다. 또 마릭카의 카레 요리 솜씨는 나이에 견주어 꽤 상당한 솜씨인 것 같았다.
마릭카가 자기의 전생이 데비였노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지 얼마 뒤에 "언니"는 그녀를 베로레 시에 있는, 자기의 오빠가 살고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집에서 커다란 사진 앞에 가서는 "나의 부모야"라고 했다. 그것은 분명히 데비의 부모 사진이었다. 집안 식구의 사진을 보여주니까 그녀는 이집 주인인 오빠를 가리키며 "이건 나의 오빠야, 그렇지만 지금은 집에 없어"라고 말했다. 실제로 데비의 오빠는 이때 직장 관계로 먼 곳에 있었다. 얼마 후 마릭카는 데비의 오빠와 만났을 때에도 이 사람을 바로 "오빠"라고 알아보고서 "언니"와 마찬가지로 강한 애정을 보였다.
마릭카에게 있어 데비로서의 전생기억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느날 마릭카가 있는 자리에서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끼리 우연히 소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그러자 마릭카는, "나는 "카운다비"의 일을 기억한다. 그리고 카운다비의 젖을 송아지처럼 빨던 강아지도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데비가 살았을 때 그녀는 한 마리의 암소에게 "카운다비"라는 인도 왕자의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그러나 이 소는 마릭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죽고 없었다. 또 마릭카가 말한 강아지는 카운다비가 새끼를 낳고 난 뒤에 그 젖을 빨아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은 이 소와 개의 이야기를 마릭카에게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릭카의 모우로가시가마니 가(家)에 대한 애착은 대여섯살이 되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 가족에 대한 것보다도 더 강한 애착을 갖는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의 부모에게는 전생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언제나 모우로가시가마니의 가족들 앞에서만 말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비의 형제, 자매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마릭카의 사례에서는 그녀의 집이 "언니"가 살고 있는 한 건물 안으로 이사를 했다는 이상한 우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데비의 생애에 대한 그녀의 기억은 어떤 자극 요인이 있을 때에만 의식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제8화. 형의 아들로 환생한 위지라트네.
이 이야기는 1947년 1월 스리랑카의 무갈칼토타에 태어난 위지라트네의 이야기이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0여년이 지나서 이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아이를 기른 후였지만 이런 모습의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왼쪽 가슴에 둥글게 패인 곳이 있고, 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은 손바닥에서 잘 벌어지지 않으며 다른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선인장처럼 손바닥 끝에 왼손 손가락의 첫째 관절 정도의 길이로 나와 있을 뿐이어서, 네개의 손가락은 마치 손바닥의 연장인 것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스리랑카는 전통적인 불교국가이기 때문에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선천적인 불구자는 전생에서 한 행위의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아이가 두살이 좀 지났을 때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손이 이처럼 조막손인 것은 전생에 아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들의 이 중얼거림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남편은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20년 전에 그의 동생이 살인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 동생 하미가 자기는 죽어서 형님 댁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라트란 하미는 자기 아내인 포디 메니케를 살해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스리랑카의 결혼 풍습은 두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법률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되고 다음에 혼례식을 올려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적으로 부부가 되어도 몇 달 동안은 친정에서 그대로 지내다가 뒤에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남편의 집으로 가면 완전한 부부가 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에 라트란 하미와 포디 메니케는 법률적 부부관계였던 것이다.
1927년 10월 14일 하미는 관례대로 정식 혼례를 치루기 위해 아내를 데리러 처가집에 갔다. 하미는 기쁜 목소리로 메니케를 불렀지만 메니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인사를 하였는데 하미는 혼례식을 앞둔 말쑥한 신랑 차림으로 서 있었다. 장모와 같이 들어온 하미는 아내인 메니케가 밥을 먹고 있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건넸으나 메니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게다가 메니케는 하미와 같이 가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큰 소리로 말다툼이 벌어지고 하미는 흥분한 채로 그 집을 뛰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 때가 못 되어서 하미는 다시 메니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메니케의 집으로 들어온 하미는 방으로 들어가 갑자기 메니케의 등을 칼로 찔렀다. 메니케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온 집안은 수라장이 되었고 하미는 도망치는 메니케의 뒤를 쫓아가서 다시 크리스 칼을 휘둘렀다. 그 때 누군가가 하미를 때려눕히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미 메니케는 숨을 거둔 뒤였다.
행복한 삶을 시작하기로 한 날에, 그와 정반대로, 두 사람은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28년 7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7년, 하미의 형 집에 위지라트네라는 소년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실은 나의 전생의 형이다. 나는 전생에서는 라트란 하미였고 웃갈칼토타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형당하던 그때의 상황을 위지라트네는 전생기억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수형이 행해지기 직전에 나를 위해 한 스님이 최후의 독경을 행하였다. 검은 헝겊이 머리에 씌어졌다. 트랩이 빗겨졌다. 나는 형의 일만 생각했다. 그리고 목이 조이는 것을 느끼고 불이 타오르는 도가니 속으로 떨어져 간다는 느낌이 되었다."
위지라트네가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후, 그가 네다섯살이 되었을 때에, 콜롬보대학 교수가 이 사례를 처음으로 조사했다. 그 뒤에 행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조사에 의하면, 많은 부분이 당시의 재판기록과 일치했으며 어떤 부분은 재판기록에는 빠진 것도 있었다고 하였다.
하미의 결혼관계에 대해 재판 기록에는 미혼(未婚)이라고 되어 있다. 위지라트네 자신의 전생기억에 의하면 "하미"는 메니케에 앞서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첫아내는 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이 하미의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메니케의 살해사건을 재판기록에서 찾아보자. "일단 메니케의 집을 사건 당일 뛰쳐나온 하미는 얼마 후 크리스를 들고 다시 되돌아가서 메니케를 죽였다"는 것이 재판에서의 사실인정이다. 이 부분에 대한 위지라네느의 전생기억은 다음과 같다.
"메니케는 모하티하미라는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있었다. 모하티하미는 메니케가 전생의 나, 곧, 라트란 하미와의 결혼을 거부하도록 그녀를 설득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메니케의 집에서는 그날 아침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뭔가가 끓고 있었다."
"결혼 최종 단계가 되었기 때문에 나(라트란 하미)는 메니케의 집에 가서 함께 우리 집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메니케는 거부했다."
"아내가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5마일 떨어진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 위에서 크리스를 갈았다."
"메니케를 설득시키지 못하였고 또 메니케의 집에서 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던 사나이를 보았기 때문에 메니케를 찔렀다."
이상의 전생 발언은 현실의 재판에서의 범인의 진술처럼 현장감이 있다. 당시에 크리스를 갈던 오렌지나무 아래의 두꺼운 판자는 그 뒤 몇 십년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었다. 위지라트네가 현재의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그것을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또 재판기록에 의하면 하미는 "나는 모하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져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크리스를 휘둘렀다. 애초부터 살인할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에서는 고의 살인이라고 인정되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여기에 대해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메니케가 나의 집에 오기를 거부했을 때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을 가지고 죽였다."
"모하티하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을 메니케 집의 가정부에게 들켜서 그것은 허사가 되었다."
"죽이고 난 뒤에 모하마티하미에게 얻어맞고 쓰러졌다."
이 세 가지의 전생 발언은 앞서 말한 "크리스를 갈았다"고 한 발언과 마찬가지로 재판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재판 기록에만 의지해서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집행까지의 한달 동안을 하미는 감옥에서 어떻게 지냈는가? 하미의 사형 집행 며칠 전, 형 티레라트네가 주선하여 부처님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법회가 십여 명의 스님들에 의해서 하미가 수감되어 있는 감방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하미는 말했다.
"형,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나는 형의 아들로 환생해서 다시 올거야."
이 "환생"의 약속은 위지라트네의 전생 발언에서도 확인되었다. 곧 "사형집행 오일 전에 형이 형무소에서 나를 위해 거행해 준 법회에 참석한 스님들의 이름까지도 말했다.
한 스님에 의해 최후의 독경이 행해진 사실과 검은 헝겊을 머리에 씌운 것은 사형집행의 관례로 보아서 당시에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나 목이 조여드는 느낌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위지라트네는 나중에는 전생의 일만이 아니고 죽은 뒤의 일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다. 즉 영계(靈界)의 일이라든지 위지라트네로 태어나기 전에 "새가 되어 살았다"라든지 하는 중간적 전생의 것들이다. 어느 것도 확인해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불교도들이 믿고 있는, 죄인은 인간보다 낮은 동물이 되어 환생한다는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제9화. 불교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영국인 조종사 란지스.
란지스는 스리랑카의 콧테에서 1942년 순수한 스리랑카인 가정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실버는 란지스가 확실한 전생기억 같은 것을 상당히 가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또 그의 행동은 스리랑카인의 아리라기보다 영국 아이에 어울리는 특징을 보이곤 하였다. 그가 두살 무렵에 구토증을 느끼고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으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스리랑카 사람들은 구토증이 나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국식의 구토촉진술이다. 또 음식에 대한 취향도 마치 서양 사람 같아서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 먹을 때에도 서양식으로 먹었다. 빵에는 서양인처럼 두텁게 버터를 발라 먹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용한 적이 없는 포오크와 나이프를 호텔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었고 사용하는 방법도 다른 형제와는 달리 서양식이었다.
그가 부모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놀랄 정도로 빨리 영어를 습득한다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는 150여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들을 기회가 많고 또 실버의 가정에서도 영어와 실론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놀라운 영어 습득 능력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병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카메라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하여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면서 도망을 쳤다. 부모를 부를 때에도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라고 하는데 그는 "부모"라고 불렀다. 실론의 어느 아이도 이런 식으로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가 가족내에서 뚜렷하게 고립적인 태도를 나타내보인 것은 서너살 무렵이었다. 그는 엄마와 형제들을 보고 "모두 나의 엄마나 형제가 아니다"고 하며, "나의 부모, 나의 가족은 영국에 있다"고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버지는 그의 전생기억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서 전생 이야기를 들어보였다. 그는 대강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영국인이다. 나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고 형제 중에 톰, 짐, 마가렛이 있다. 아버지는 큰 기선을 타며 파인애플을 선물로 사 왔다. 기선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은 언덕 위의 외딴 집이다. 저어지나 오버코트를 입는 일도 있었다. 마당이나 길에 얼음이 어는 추운 날 아침에는 불 옆에서 몸을 녹였다. 길의 얼음을 치우러 차가 온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인이지 불교인이 아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그 때에는 내가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형제들을 태우고 갔다."
얼음을 치우러 오는 차가 모터가 달린 차인지 아니면 말이 끄는 것인지를 묻자 그는 마차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었는가라는 물음에 스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며, 어떤 과일을 먹었는가 하고 물으니 포도와 사과를 먹었다고 한다. 이런 란지스의 이야기에 나오는 얼음이나 마차는 실론에는 없는 것들이다.
란지스가 네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지방 방송국에 부탁해서 생일을 축하한다는 전문을 영어로 방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누이가 미리 그에게 "오늘 오후 5시 영국에서 엄마가 너의 생일을 축하하는 말을 방송해 온다"고 일러두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가족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았고 그가 가장 가까이에 앉았다. 잠시 후 여자 아나운서가 영어로 "란지스의 생일입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손을 나팔같이 만들어서 라디오에 대고 "엄마, 나 실론 사람의 집에 있어. 그리고 데려가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생일축하"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역시 엄마야, 엄마는 나를 "다아링"이라 하고 가끔 "스위트 하트"라고 했어." 곁에 있던 숙부가 "어떻게 엄마 목소리인 줄 알았지?" 하고 묻자, 그는 "엄마는 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말처럼 천천히(softly) 얘기하니까"라고 대답했다. 라디오에서는 분명히 말을 천천히 했다. 그러나 실론 사람이 영어로 "천천히" 말할 때는 slowly라고 하지 softly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송 사건은 란지스를 우울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란지스가 전생 일을 빨리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라고 엄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란지스도 전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란지스가 십대가 된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학교를 그만 두고 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해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는 그의 소원을 허락했고 그는 자동차 수리공장에 일하러 나갔다. 그러자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자동차의 구조와 운전에 숙달되었다. 이리하여 그가 열여덟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영국으로 보내주었다. 그가 자동차 엔지니어가 되었으면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2년 동안 영국에 머물었는데, 영국인과 친숙하게 사귀었으며 런던이나 그 근교의 거리가 옛날부터 익숙한 장소인 듯이 느끼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그는 영국에서 보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귀국하여 자동차 관계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1970년 11월 스물 다섯살 때에 이안 스티븐슨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생에 영국인 조종사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 비행기가 내가 태어난 콧테 근방에 추락해서 죽었고 거기에서 환생한 것 같아요." 2차대전 중 콧테에는 영국 공군기지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 죽은 영국인 조종사도 많았다. 그러나 그의 전생 이야기 중에는 조종사로서의 전생을 조사할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구체적 자료가 불충분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란지스의 경우는 좋은 실례가 된다 하겠다.
제10화. 전생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이맷드.
이맷드 에라와르는 1958년 12월 22일 라일 레바논의 코오나엘에서 모하멧드 메라와르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나엘은 베이루트에서 동쪽으로 24㎞정도 떨어진 곳으로, 도루스교도들의 유일한 거주지이다. 이맷드가 자라면서 처음 걷기를 배우고 또 말을 하게 되자 그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걸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행복해."
그의 이런 말은 그의 어머니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살 반에서 두살이 될 무렵 '쟈이레'와 '마하모드'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처음으로 말하였다. 전생 발언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고는 보우햄지 가(家)의 가족과 함께 크리비이 마을에 살았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사람의 이름도 말했다. 크리비이 마을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손짓까지 해가면서 "아주 먼곳에 잇다"고 하였다. 실은 코오나엘 근처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있었지만 그가 손짓까지 하는 그 '먼곳'의 마을은 아닌 듯 싶었다. 또 손가락을 두개 가지런히 해보이면서 쌍동(雙胴)의 총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이맷드가 두살이 되던 어느 날 할머니 손을 잡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한 남자쪽으로 달려가더니 그의 다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의아해했다.
"아가야, 이 아저씨를 아니?"
"그럼요, 우리 마을 사람인 걸요."
그는 사림 아슈라고 하며 이맷드가 말하던 '먼곳', 곧, 크리비이 마을 사람이다. 사림은 코오나엘에 있는 처가집에 왔던 것이다.
이멧드가 네살이 되던 해 가을, 이맷드의 집을 방문한 마셀쇼프 마을의 여자가 있었다. 쇼프 마을은 크리비이에 가까운 곳인데 그녀는 이맷드가 말한 이름의 사람들이 실제로 크리비이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코오나엘로 시집온 딸을 찾아온 것이다. 이 여자는 이맷드와 함께 그의 부모와 대화를 하다가 말했다. "아가야, 네가 말하는 케말 조움브랫드 씨는 벌써 죽었어." 케말은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 따르면 그의 전생의 친구였다. 이 말을 듣고 이맷드가 하도 슬픈 표정을 짓기에 그 여자는 이맷드에게 자기가 거짓말로 그렇게 해 보았다고 말하자 그는 성난 얼굴을 하며 소리쳤다. "어서 나가, 이 거짓말쟁이야." 이것은 그의 부모가 처음으로 본, 전생에 대한 아주 강한 감정의 반응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맷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동안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추정하였다. "이맷드의 전생은 크리비이 마을의 마하모드 보우햄지이고 쟈미레라는 아내를 갖고 있었다."
1963년 12월 이맷드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어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크리비이에 가게 되었다. 그곳은 코오나엘에서 24㎞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보우햄지 가의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고 이내 돌아왔다. 이맷드가 자주 말한 전생 발언 중의 하나가 자동차 사고였다. 그는 버스 사고와 트럭 사고를 생생하게 말했다. 또 아주 어릴 때부터 대형 자동차를 거의 병적이라고 할 만큼 무서워하였다. 이맷드의 아버지가 장례식 때문에 크리비이에 갔을 때, 그 장례를 치르는 셋드 보우햄지라는 사람과 같은 이름의 사람이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이맷드는 '셋드라는 친구가 있다'고 말했고 이어 다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는데, 그들이 친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셋드가 사실은 이맷드 본인일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맷드가 다섯살 하고 삼개월이 되었을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우연하고도 다행스럽게도 그를 만날 수 있어서, 이 사건의 조사를 직접 진행할 수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크리비이 마을에 처음 와서는 이맷드의 전인격은 트럭 사고로 죽은 셋트 보우햄지라고 한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셋드는 1943년에 트럭 사고로 죽었다는 것과 작년에 죽은 셋드와는 친구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전생의 친구라고 한 '유셀프 하리비'를 만나서 그가 셋드와 친구였다고 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셋드의 아내는 쟈이레가 아니라는 것과 마하모드 보우햄지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셋드의 아들 하페츠를 만났을 때 그의 부친이 환생한 인물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시리아의 같은 도루스 교인에게 시집 간 셋드의 여동생의 아들로서 스레이만이라는 사람이다. 셋드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스레이만은 그 반년 후에 출생하여 지금은 스무살이 되었다고 한다.
이 스레이만의 출현으로 인하여 이맷드의 전인격(前人格)은 공중무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페츠는 말했다.
"그 아이가 말한 것 중에서 부친의 생애와 꼭 부합되는 것은 트럭 사고 뿐입니다. 그 아이는 사냥도 좋아하고 총도 가지고 있었으며 집앞의 도로는 가파른 고갯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전혀 틀립니다. 또 부친은 쟈미레라는 여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도 이미 알지 않습니까?"
사실 그랬다. 하페츠가 지금 사는 집은 셋드가 살고 있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맷드가 말하던 집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셋드가 사고로 인해서 부상을 입고 그 후에 치료 받은 것에 대한 이야기는 이맷드가 말한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것이 하페츠로 하여금 보우햄지 가(家)의 인물 중에서 이맷드의 전인격을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셋드의 사촌 이브라힘을 생각해내었다.
"이브라힘이라는 사람도 트럭 사고로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는 폐병으로 죽었어요. 그렇지만 그는 다른 점에서는 모두 합당해요." 하페츠는 즉시 우리를 창가로 안내하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한 채의 집을 가리켰다.
"저기 벚꽃나무가 보이지요?"
분명히 이맷드의 전생 발언에서는 집에 벚꽃나무가 있었고 그 근방은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또 셋드와 친구인 하리비가 이브라힘과도 친구 사이인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맷드의 전인격을 이브라힘이라고 본다면 그의 전생 발언은 맞는 셈이다.
이브라힘은, 1949년 9월 18일에, 그전에 일년 정도 요양원에서 치료하다가 스물다섯살에 사망했고 그것은 이맷드가 출생하기 9년쯤 전의 일이다. 셋드의 아들 하페츠의 증언으로 일단 이맷드의 전인격은 이브라힘인 것으로 단정을 지었다. 그러나 큰 의문점이 남아 있다. 이맷드가 보여준 자동차 공포증이며 또 걸을 수 있는 일의 행복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무슨 까닭에서 일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문으로, 이맷드는 "트럭 사고는 운전수와의 싸움 뒤에 일어났는데 운전수는 일부러 치어죽이려 했다"고 말했지만, 하페츠는 싸움이 있었을 리가 없다고 하였는데, 당시의 재판 기록에서도 운전사의 단순과실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다른 점에서는 모두 정확한 이맷드의 전생 발언이 왜 여기서는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이브라힘의 임종에 대한 하페츠의 설명에 의하면 이브라힘은 일년 정도 결핵요양원에서 지내다가 스물다섯살에 죽었다. 마지막 반년 동안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다가 죽기 이틀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임종은 자택에서 하고 싶다는 희망에서였던 것 같다. 하여튼 젊고 원기왕성하던 그가 오랫동안 병상생활을 강요당했으니 걷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희망했겠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럼 자동차 사고는 어떻게 된 일인가? 트럭 사고와 버스 사고에 대한 이맷드의 발언에 대해 많은 증언을 모은 결과 그의 발언에는 틀린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입증하기 곤란한 것은, 트럭 운전수와 싸웠는데 그 운전수가 죽이려고 고의적으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판기록에는 충돌사고는 단순과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게서 셋드가 죽을 때의 상황을 전생기억으로 확인했다. 그는 셋드로서의 자신이 사고가 나기 전에 싸웠다는 것은 현재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부분은 이맷드의 전생기억이 틀린 것이다.
셋드는 사고 후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몇 시간 만에 죽고 말았다. 셋드의 자동차 사고는 이브라힘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다. 자기 집안에서도 버스와 트럭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버스 사고 후에는 운전을 두려워하여 죽을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브라힘의 대형 자동차 공포증은 스티븐슨 교수가 만난 다섯살 무렵에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스레이만도 모든 차에 대해서 심한 자동차 공포증을 보였는데 그것은 열한살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어볼 때 이브라힘은 트럭과 자동차의 두가지 차 사고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맷드의 전생기억 중 가족과 친구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전생에 '후다'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가 어릴 때 태어난 여동생의 이름을 '후다'라고 하자고 부모를 졸랐다. 또 그는 '셋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형제라고 했다. 그들은 이브라힘의 사촌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이다. 케말 조움브랫드는 쇼트 마을의 여자가 거짓으로 죽었다고 말해서 이맷드가 화를 내었던 그 사람이다. 그는 이브라힘과 셋드와 공통의 친구로 도루스 교도 중에서는 유명한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다.
이맷드의 전생이 셋드가 아니고 이브라힘이라고 추정한 후에 스티븐슨 교수는 그를 크리비이로 데리고 왔다. 우선 처음에 셋드의 전생집(지금은 하페츠가 사는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했다. 사진첩을 보여주며 몇몇 사람을 지적했지만 그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페츠조차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에는 셋드의 집을 나와 이브라힘의 생전 집으로 갔다. 이브라힘이 죽은 뒤에 그 집은 폐쇄되어 있었다. 이맷드의 전생 발언대로 마당에는 벚나무가 있고 집 앞은 가파른 언덕길이 뻗어 있었다. 여동생 '후다'는 알아보았지만 어머니는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10여년 동안에 너무 많이 늙어버린 것이다. 사진을 한 장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진의 인물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이브라힘의 사진이었다. 그의 전인격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결정적인 발언이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고는 남동생인 '파우드'라고 하였다. 자기가 마지막 이틀 동안 누워 있던 침대를 알아보았다. "아가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했어?" 하고 후다가 물었다. "후다, 파우드를 불러줘"라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락은 두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그 사이의 칸막이를 가리키며 거기에 종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다. 이브라힘은 사냥을 무척 좋아하며 법으로 금지된 라이플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 벽 칸막이에 총을 숨겨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뿐이었다. 이맷드는 이전부터 "총을 다락방에 숨겨두었다"고 말했다. 이 지방에서는 보통 쇠사슬에 매어주지 밧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맷드가 집에 대해 말한 것도 거의 맞았다.
"집에는 우물이 두 개 있다."
"내가 죽을 무렵 정원을 고쳤다. 벚나무와 능금나무를 새로 심었다."
"차고가 둘 있었다."
"기름난로가 있었다."
한편 이맷드가 어릴 때부터 항상 말해오던 쟈이레라는 미인이 있는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대개 이런 여자이다.
"나에게는 쟈이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인이다. 옷 입은 맵시가 예쁘고 하이힐을 신었다. 빨간색의 옷을 잘 입었고 또 자주 사주었다."
그러나 레바논에서 하이힐을 신는 여자는 도루스 교도 중에는 퍽 드물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하페츠로부터 쟈이레에 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다. 그녀는 이브라힘이 결핵으로 죽기 직전까지 그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이웃 동네의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맷드가 크리비이에 왔을 때 스티븐슨 교수는 쟈이레가 어느 마을에 사는지를 조용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맷드는 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쟈이레가 살던 마셀 쇼프 마을 방향을 정확히 지적해보였다. 그러나 이맷드가 코오나엘에서는 그녀의 일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정작 쇼프마을에 좀더 가까운 크리비이에 와서는 그녀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연애사건을 가족 앞에서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심리적 측면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쟈이레가 결혼하여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맷드는 열살이 되었을 때 엉뚱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자기는 쟈이레의 딸과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된 그녀와는 결혼할 수 없으니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생과 현생에서 죽음의 단층(斷層)을 넘어서는 참으로 기구한 사랑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맷드는 열살이 지나서도 상당한 전생기억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열살 때에 처음으로 마하모드 씨를 만났다. 이브라힘의 삼촌으로 그의 전생기억에서 맨 처음으로 말하던 사람이었다. 이때 마하모드 씨는 수염이 없었지만 수염이 있는 사진을 보여주니 금방 알아보았다. 또 마하모드 씨와 함께 크리비이 마을의 큰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한 군인을 만났다.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프랑스 군대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브라힘이 프랑스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맷드도 학교 공부 중에서 특히 프랑스어를 잘하였다.
한편 이맷드는 한때 다하르엘아하르에서 산 일이 있다고 하며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그것은 이브라힘과는 다른 생애이다. 그러나 그의 중간적 전생이 너무 단편적이어서 증명하거나 조사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는 1973년에 열다섯살이 되어 정상적인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에서 셋드의 환생인 스레이만 보우햄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셋드 보우햄지가 트럭 사고로 죽은 것은 1943년 6월 8일이고, 그의 환생인 스레이만은 같은 해 12월 3일에 시리아의 라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셋드의 여동생으로, 같은 도루스교도의 집안에 시집온 것이다. 스레이만은 말을 하게 되면서 자신은 셋드의 환생이라고 하였다. 서너살 무렵에 처음 크리비이 마을에 왔다. 당시 열한살쯤 되었던 하페츠의 말에 의하면 스레이만은 혼자서 셋드의 집을 정확하게 찾았다. 셋드의 사고와 죽음의 상황을 이야기했고 하페츠 등 아이들을 알아보며 이름을 말했다. 또 자기보다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에게 부친다운 태도를 보이며, 자기의 어머니를 '여동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페츠 자신도 어린 시절 크리비이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분간했던 것, 마을의 밭이나 포도밭의 경계를 정확히 지적했던 일, 셋드의 소유인 권총과 웃옷 등을 구분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제11화. 전생에서 환생을 약속한 마르따.
1917년 10월에 스물여덟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는 브라질의 돈 페리시아 마을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번이나 연애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나머지 폐병으로 죽었다. 특히 그녀의 두번째 애인이었던 후로징호가 주위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이다.
마리아가 죽고 열달이 지난 1918년 8월 14일, 이 지방의 학교 교사인 로렌쯔 부부 사이에 열두번째의 아이인 마르따가 태어났다. 그녀가 두살 반이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에, 그 부모는 즉시 이 아이는 마리아 준아리아의 환생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마르따가 한살이 되기 조금 전에 그녀의 전생의 아버지인 오리베이로가 로렌쯔 씨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오리베이로 씨에게 안기려 하며 '아빠'라고 부르는 듯 하였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의 전생이름을 '마리아'라고도 하고 또 '싱하'라고도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이름 하나는 '준아리아'라고 하느냐고 그의 아버지가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전생 이야기는 사망한 싱하의 아버지 오리베이로 씨의 농장의 상황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소와 양들이 많이 있고 오렌지가 많이 열렸다고 하며, 우물물을 먹었다고 했다. 또 어머니의 말안장을 보면서 자기와 함께 산 것이라고 했다. 싱하와 이다는 사이가 좋아서 사실 그랬던 것이다.
마르따는 자기가 싱하였을 때 몹쓸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그것은 마을 축제에 구경갔다가 심한 비를 맞은 이후부터였다고 했다. 싱하는 폐병으로 죽었다. 싱하의 임종 직전에 문병을 갔었던 마르따의 어머니 이다는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다 곁으로 다가와서 그 귀에 속삭이는 시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난 꼭 환생할 거야, 당신의 딸이 되어서.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생애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거에요."
그러나 그때 싱하가 겨우 한 말은 "난, 난 약속해...." 하는 말이었다. 이 '마지막 약속'은 마르따가 전생 발언을 시작하기까지는 로렌쯔 부부만이 알고 있었다. 싱하의 장례식은 폐병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겨우 몇 사람만 참석했는데 마르따는 그때 참석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그녀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질렀다. 세리카가 "싱하, 싱하"하면서 자기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세리카의 환상(幻想)을 본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세리카의 죽음이 전해졌다. 세리카가 죽은 시각은 마르따가 환상을 본 시각과 꼭 맞았다. 세리카는 싱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다는 싱하에게 물어보았다.
"싱하는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어떻게 나를 대해주었지?"
"커피를 준비하고 집앞의 돌 위에 축음기를 장치하고서 집 밖에 나가 기다렸지요."
사실이었다. 이다의 집과 싱하의 농장과는 12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싱하는 이다가 오는 날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싱하도 마르따와 같이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마르따는 자기 집에 온 싱하의 첫번째 애인을 알아보았다. 또 사촌도 알아보았다. 어느날 부친의 상(喪)을 당한 마을 여인이 마르따의 집에 왔을 때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생명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것이예요. 나를 보세요. 나도 죽었었지만 이렇게 아직 살아있잖아요."
마르따가 열두살 때 오리베이로의 농장에 갔다. 가면서 농장으로 가는 도중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전생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더니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시계 뒤에 금색으로 자기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고 했다. 벽에서 떼내어 보니 과연 금색으로 '마리아 준아리아 데 오리베이로'라는 싱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흑인 노예의 이야기, 집에 있던 고양이 따위에 대한 전생기억은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싱하는 일부러 병사(病死)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최후는 목과 폐를 앓아서 거의 말도 하지 못했었다. 마르따도 어릴 때부터 기관지염을 잘 앓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잠겼다고 한다. 또 마르따는 피와 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를 갖고 있었다. 그 후 쉰살이 더 지나도록 싱하의 자살한 애인 후로징호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제12화. 언니가 죽어서 남동생으로 환생한 파우로.
파우로는 앞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르따의 남동생이다. 그는 마흔세살에 피해망상증으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자살하였다. 파우로 역시 어느 인물의 환생이었다. 곧 로렌쯔 집안에는 형제들 중에 환생한 아이가 둘이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렌쯔 씨에게는 파우로 위로 열두명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맨 위의 누이가 '에미리아'라고 했다. 그녀는 열아홉살이던 1921년 10월 12일에 약물자살을 하였다. 로렌쯔 씨가 심령문제를 연구하였듯이 그의 아내도 심령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하여 영혼과 직접 교신을 하기도 했다. 에미리아가 자살한 얼마 후에 모친은 에미리아의 영혼에게서 통신을 받았다. 그녀는 자살한 것을 후회하며 남자아이로 환생해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런 예언이 있은 뒤에 에미리아가 자살한 지 약 1년 반이 지난 1923년 8월 3일에 파우로가 태어났다.
파우로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하고만 놀고 남자와는 놀지 않았으며, 또 인형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리고 옷도 바지를 입지 않고 스커트만을 입으려고 하였다. 음식 먹는 데 있어서 그에게는 흥미로운 버릇이 있었다. 빵을 먹을 때에는 아무리 새로 만든 부드러운 빵이라도 가장자리를 뜯어내고 먹었다. 이것은 에미리아와 같은 버릇이었다. 네살 때에는 배운 적도 없는 재봉틀을 사용하여 바느질을 하였는데, 집에 있는 재봉틀을 보고 자기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재봉하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것은 에미리아으 재봉 수업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에미리아가 동생들 중에서 로오라를 가장 귀여워했듯이 파우로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누이인 로오라의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하였다.
에미리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에 불만을 품어왔다. 20세기 초의 브라질에서는 여자에게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고, 특히 미혼여성이 혼자서 여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미리아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동생들에게 자주 말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파우로도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서른아홉살이었을 때인데 그는 그때가지도 여성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었다. 교수는 그에게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것은 동성애의 남자와 여자를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파우로는 여성경향도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는 독신이었고 결혼할 뜻도 없는 듯 하였다. 그는 여행 등의 자유에 대한 희망과 여성적인 경향의 두 가지 이유로 독신으로 지내다가 마흔세 살 때 자살하였다.
제13화. 손자가 되어 환생한 윌리엄.
다음에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는 알래스카와 카나다에 살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는 트란짓트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이들은 모두 가명을 썼는데 남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다는 관계자들의 희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훌륭한 어부였다. 그는 다른 트란짓트인과 마찬가지로 환생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으며,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환생하고 싶은 소망은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자기 아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셋째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기가 만일 환생한다면 그들의 아들로 환생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있는 두개의 반점을 가리키면서 그 아이는 이와 똑같은 모반(母斑)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니 이 표시로써 자기가 환생한 것인 줄 알라는 것이었다. 그 두개의 반점은 하나는 왼쪽 어깨에, 또 하나는 왼쪽 팔꿈치 옆에 있었다. 윌리엄 죠오지 1세는,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아들에게 주면서 그 시계를 잘 보관해 두라고 하였다. 훗날 환생할 것임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했다.
그러고서 몇 주일 후인 1949년 8월에 그는 자신이 일하던 어선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그 뒤에 얼마 안 가서 셋째 며느리는 임신을 하여 1950년 5월 5일에 아기를 낳았다. 이 아이는 아홉번째 아이였다. 윌리엄 죠오지 1세의 실종이 있은 지 9개월이 경과한 뒤였다. 며느리는 출산시의 진통 중에 꿈을 꾸었다. 시아버지가 나타나서 빨리 자기 아들과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꿈에서 깨어난 뒤, 마치 시아버지가 있는 것 같은 환각에서 주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녀가 꿈속에서 본 시아버지는 죽기 전의 어른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시아버지의 경우처럼 왼쪽 어깨와 왼쪽 팔에 검은색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아기에게는 윌리엄 죠오지 2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는 성장하면서 그의 할아버지인 윌리엄 죠오지 1세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도록 하였다. 1세와 얼굴이 닮은 것은 물론이고 걸음걸이와 성격까지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고기잡이나 배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고, 어느 만(灣) 부근이 제일 좋은 어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선의 그물 사용법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아는 듯이 보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보석함을 정리하고 있는데, 방에 우연히 들어왔다가 금시계를 보더니 "이건 내것이야"하면서 자기가 갖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후 열살쯤 되면서부터는 전생기억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14화. 부족 전쟁에서 전사 후 환생한 찰스.
이 사례에서는 어린 시절에 전생기억을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당사자가 자기의 전생을 이야기하였다. 1961년 스티븐슨 교수가 조사할 당시에 찰스 포터 씨는 쉰살이 넘은 사람으로서, 이제는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로써 자기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이 사례는 다른 것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린 시절에, 그는, 트란짓트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싸우다 창에 찔려 죽은 사람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해당한 장소와 죽인 상대방의 이름, 또 자기의 전생의 이름 등도 말했다는데, 전생에 자기를 죽였다는 사람은 그의 외숙부였으며 당시에 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찰스가 자기의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오른쪽 배를 가리키며 창에 찔려 죽었다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처가 있는 줄을 안 것은 성장한 뒤에라고 말했다. 그의 오른쪽 배의 늑골 바로 밑에 검은색 반점이있는 것을 스티븐슨 교수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창으로 찔린다면 간장을 상해서 즉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찰스 포터는 1907년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살 위인 누이의 말에 의하면, 찰스가 부족 전쟁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 시기는 1909년에서 1915년 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한 노인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가령 이 노인이 1910년에 적어도 예순다섯살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1845년에 출생한 셈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트란짓트인이 부족 전쟁에서 점차로 창을 사용하지 않게 된 시기는 1852년에서 1882년 사이일 것이라고 한다. 18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장성하여 창을 쓰는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맞는 것이다. 부족 전쟁 중에 창으로 살해되었다는 찰스의 말은 이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다.
이미 아흔살이 넘은 찰스의 어머니도 만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전인격(前人格)이 살해되었다고 하는, 문제의 전투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참가 인물 등의 일을 이 이상 확인할 수가 없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그 뒤에도 62년, 63년, 65년, 72년에 각각 앨러스카의 그를 방문하였고, 때로는 편지연락도 했다. 1972년 예순다섯살인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제15화. 창검에 대한 공포를 가진 데레크.
1852년(또는 1853년)에 알래스카의 시트카와 랑겔 두 지역의 트란짓트인들 사이에는 화평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시트카 측에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랑겔의 대표자 사십여 명을 살해했으며 그 중 몇 명만이 겨우 랑겔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 일이 있는 뒤로 1918년에 새로이 화평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양 부족 사이에는 반목이 계속되었다.
데레크가 출생한 것은 1918년으로, 그 참극이 있은 지 60여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에 모반(母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신은 어릴 때부터 이 점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조상 중 어떤 한 사람의 신상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서른여덟살이 된 1955년이었다. 어느 날 문득 웬 할머니가 그 모반을 보더니 랑겔의 토착민인 '쿠'라는 사람이 입은 치명상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일러준 것이다.
데레크는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쿠'라는 사람은 앞서 말한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자기 부족인들을 죽이려거든 자기를 먼저 죽이라고 하며 맨손으로 당당하게 대항하다가 가장 먼저 살해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데레크 자신은 전생의 기억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쿠에 대한 전생기억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쿠와의 사이에서 깊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어린 시절부터 칼, 총, 창 등에 특별한 공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소년 시절에도 다른 아이들처럼 칼을 가지고 놀거나 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군대에 입대했으나 총검의 훈련을 아주 싫어했다. 또 자신의 아이들도 칼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그의 병적인 공포증은 총과 같은 다른 무기에 대해서는 나타나지 않고 칼날이 달린 무기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는 랑겔 태생인데 시트카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스스로 시트카에 거주하면서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의 조직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 두 지역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좌절과 실망을 거듭하면서도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 시트카의 트란짓트인에 대한 그의 행동에서, 화평 교섭을 위해 시트카에까지 원정을 가서 생명을 잃은 쿠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이 지나고 장년기에 이르도록 칼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식사 때에 나이프를 쓴 적이 없다고 하였다. 또 데레크 자신은 긴장했을 때 가끔씩 배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전생과 질병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16화. 조카딸의 아들로 환생한 콜리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트란짓트인들 중에 빈센트라는 사람은 죽기 1년쯤 전에 그의 누이의 딸, 곧, 조카딸인 초트킹 부인에게 강한 친근감을 보이면서 그녀의 아들로 환생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그는 지금의 자기처럼 말더듬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와 꼭 같은 흉터를 갖고 있을 터이니 그것이 자기의 환생 증표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등에 있는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또 코 오른쪽에 있는 점을 가리키며 그것도 증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빈센트가 죽고 8개월이 지난 1947년 12월에 초트킹 부인은 아들을 낳고, 그를 콜리스 초트킹 2세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태어나면서 빈센트가 죽기 전에 말했던 것과 똑같은 점과 흉터를 코와 등에 갖고 있었다. 콜리스가 말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그의 이름을 물으면 '카코디'라고 하였다. 그것은 빈센트가 속해 있던 부족 이름인데,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에서 부족 이름인 '카로디'로 알려져 있었다. 콜리스는 그것을 완전한 트란짓트의 발음으로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의 숙모가 전에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곧 그녀는 콜리스가 태어나기 좀 전에 빈센트가 초트킹에 와서 살게 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콜리스가 두살이 되었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빈센트의 딸과 아들 그리고 그 부인을 만났는데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기회에 그는 빈센트와 친척 사이인 사람들을 몇 명 알아보았다. 그는 빈센트와 관련된 사건 두 가지를 말하였다. 하나는 생전의 빈센트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엔진 고장으로 위험한 상황에서 다른 배의 구조를 받은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빈센트로서 자기 부인과 함께 현재의 콜리스 씨 집을 방문했을 때에 잠자던 방을 기억해낸 것이다.
콜리스의 어머니가 놀란 것은 그가 보여준, 빈센트와 흡사한 몇 가지 행동의 특징이었다. 콜리스는 머리를 빗을 때 언제나 이마쪽으로 머리를 내려빗었는데 그것은 빈센트와 똑같은 습관이었다. 더구나 이것은 부모가 빗어주던 머리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또 빈센트는 아주 심한 말더듬이었다. 환생해서는 말더듬이가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까지 했지만 콜리스도 심한 말더듬이었다. 유달리 신앙심이 깊은 것도 같았다. 빈센트처럼 콜리스는 배와 해상생활을 좋아해서 바다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빈센트가 왼손잡이였듯이 콜리스도 어린 시절에는 그랬었다.
제17화. 데자 뷰에 의해 전생을 기억한 노먼.
노먼은 1944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서너살쯤 되던 어느 날 부모와 함께 고향에서 50㎞쯤 떨어진 외딴 바닷가에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노먼은 갑자기 흥분하여 자기는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하고 있었고 나중에 장님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흥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의 이 말은 그의 할아버지인 헨리 데스피스 1세의 생애와 두가지 사실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 할아버지는 어업에 종사하며 이 바닷가에서 훈제소를 갖고 있었다. 1935년에 여든다섯살로 죽었는데 마지막 4년 동안은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30년에 이 훈제소를 버렸고, 노먼이 그곳에 간 1947년에는 말뚝 몇 개가 남아 있을 뿐 훈제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노먼은 이 바닷가에서 한 말 이외에는 전생의 일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것으로써 노먼은 할아버지가 환생한 증거라고 생각했다.
노먼은 시력이 약해서 열네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되었다. 심한 근시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나 또 그의 네 형제들은 시력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이 사례에서처럼, 처음보는 상황이 과거 어느 때에 체험한 것 같다는, 일종의 착각 현상인 데자 뷰(Deja-Vu) 경험에 의해 환생을 말하는 사례는, 구체적인 자료는 적으나, 세계적으로 많이 발생하는 환생 사례이다.
제18화. 누님의 아들로 환생한 지미.
지미 스벤손은 1952년 11월 22일 시트카에서 태어났다. 그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두살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생에 현세의 엄마의 동생이었으며 크러쾅 마을에 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트카에서 약160㎞쯤 떨어진 크러쾅에는 엄마의 동생인 존 시스코가 이전에 살았었다. 지미는 화가 날 때면 이렇게 이삼년 동안 전생 이야기를 하다가 그 뒤로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1961년에 이 사례를 조사했는데 그때 아홉살이던 지미는 이미 전생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그의 부모와 형제들의 간접증언에 의한 것이다.
지미의 외삼촌 존 시스코가 죽은 것은 1950년 여름으로 스물다섯살 때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의 여인과 함께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에 뱃놀이를 나갔는데 몇 시간 뒤에 보트만 발견되었다. 그의 사망이 단순한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두 여인의 질투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지미는 자기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의 배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네개의 모반(母斑)이 있었다.
그밖에도 몇개의 환생기억을 이야기했다. 자기는 존이지 지미가 아니라 하면서 크러쾅에 가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 뒷날 크러쾅에 갔을 때 마을 사람들이나 장로에게 강한 친밀감을 보였으며, 시스코의 친구였던 이를 만나서는 고기잡이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외삼촌 한스 시스코에게 "나는 조카가 아니고 동생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생기억은 네살 때부터 흐려지기 시작했다.
제19화. 전생의 총탄 흉터를 가진 헨리.
헨리 엘킨은 1899년 앙군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의 가슴과 등에는 모반이 있었는데, 서로의 위치로 볼 때에 총탄이 앞뒤로 관통한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생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앙군의 공회당에 갔을 때에, 건물 안의 한 곳을 가리키며 "저기서 예전에 외할머니를 자주 보았다"고 말한 적이 있을 뿐이다. 1880년 이전에는 여자들이 이 공회당에 모여 전쟁에 나간 남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헨리는 여덟살 때에 전생에 대한 일을 문득 기억해냈다.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구해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그런 사건은 있었지만 그것은 헨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라고 했다.
헨리의 이런 기억들을 확인할 다른 방법은 없다. 오직 그의 진술에 의거할 뿐이다. 스티븐슨 교수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이 바다에서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말했다. 곧 부모에게서 "그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줄 무렵에는 아직 너의 누이가 살아 있었고 누이는 그때 아버지의 배에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누이란 아직 헨리가 어렸을 때 열두어살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이야기에서 볼 때 이 누이가 죽었을 때 그는 대여섯살쯤 되었으리라고 보면, 헨리는 1899년에 태어났으니, 누이의 죽음은 대략 1905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때가 열두어살 때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1892년에 출생한 셈이다. 이 누이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간 것은 대여섯살 이후였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문제의 인명구조 사건은 1897년 쯤의 일이다. 헨리가 태어난 1899년에서 불과 2년 앞선 일이다.
헨리의 전생기억이 분명하다면 이것은 전생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이런 기억들을 그가 환생하기 이전의 중간적 생애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사례는 트란짓트인의 사례 조사에서 중간적 생애에 대한 전생기억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20화. 여자로 환생한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 떨어진 탈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 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 긴 터널을 지나간다. 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 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켈레에 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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