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서재철의 DMZ이야기   기사입력 2018-07-29


④ 월북·탈북자들






가면 반역자, 오면 영웅이었다. 군사분계선을 오간 사람들의 운명이다. 65년 넘는 동안 예외가 없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사람들은 모두 반역자가 되었다. 조국을 버리고 간 것으로 취급했다. 남과 북 마찬가지였다. 가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오는 것도 자신의 체제를 버릴 때만 환영했다. 국군이고 인민군이고 군사분계선을 응시하면서 불철주야 경계를 펼친다. 그렇지만 삼엄함을 뚫고서 죽음을 불사하고 조국과 가족을 뒤로한 채 군사분계선을 넘은 사람들이 있었다.



재떨이 던진 박정희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경우는 현역 군인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유운학 중령이다. 1977년 10월20일 연천 일대 비무장지대(DMZ)를 담당했던 육군 20사단 62연대 대대의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 오봉주 일병과 함께 월북을 했다. 당시 유 중령은 자신의 작전구역인 비무장지대 내부를 흐르던 역곡천을 따라서 군사분계선을 넘어갔다. 유 중령의 월북은 국군한테는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이었다. 정전협정 이후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사건 중 가장 충격적인 것 중의 하나였다.


전방 대대장의 월북은 당시 군 전체는 물론 청와대까지 발칵 뒤집어 놓았다. 사건 당일 유 중령의 월북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 자리에서 재떨이를 던지며 20사단을 비무장지대에서 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날 밤 연천의 20사단은 비무장지대 경계작전부대에서 교체됐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군의 중심은 육군이었다. 가장 큰 임무는 전방의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것이었다. 비무장지대는 육군의 대표적인 11개 사단이 경계작전을 담당한다. 1개 사단은 감시초소(GP·지피)와 전방초소(GOP·지오피) 철책선 등의 경계작전구역을 동쪽과 서쪽 둘로 나누어 각각 1개 대대가 담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대대장의 월북은 후방지역 사단장(소장)의 월북에 버금가는 심각한 일이었다.


유 중령의 월북으로 당시까지 국군의 전방경계작전에 관한 내용과 지침이 모두 교체됐다. 더구나 유운학 중령은 대대장 보직을 맡기 전에는 보병학교에서 유능한 전술교관이었다. 유 중령의 월북으로 육군의 군사교리와 전술 및 작전에 관한 사항 등의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했다. 국군의 입장에서는 장교 한 사람의 월북치고는 유무형의 피해가 엄청났다. 군 내부에서는 쉬쉬했지만 영관급 이상 장교들 사이에서는 두고두고 회자된 사건이다.


유 중령의 월북은 사생활, 도박 등 개인적인 문제 때문인 것으로 처리됐다. 하지만 유 중령의 동기 중에서는 ‘고지식하긴 해도 성실하고 유능한 장교’로 그를 기억하는 이도 있었다. 유 중령 대대의 책임 구역 상공으로 육군 소속 군용비행기 한 대가 북으로 넘어간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월북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당시 20사단 기무부대장이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학봉이었다고 한다. 요즘 같으면 기무부대장부터 군복을 벗거나 징계를 받을 중대한 대북·방첩사안이었다. 그러나 이학봉은 무사했다. 그가 당시 전두환, 노태우와 같은 하나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미군들


역곡천은 비무장지대를 관통해 흐르는 하천 중에 드물게 남쪽의 실개천과 지류들이 모여서 북으로 흐른다. 본래의 큰 물줄기가 북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흘러간다. 또 물줄기가 이리저리 휘어가는 지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숨어서 오가기가 쉬웠다. 이런 흐름 때문인지 1950년대부터 역곡천을 따라서 남과 북을 오간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월북하거나 탈북하는 국군과 인민군의 주요 통로였다. 역곡천은 1970년대 이후 유 중령을 포함해 4명이 올라가고 4명이 내려왔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적진의 품’으로 갔는지 그 속내를 알 길은 없다.


비무장지대 내부에는 길이 있다. 일반적인 예상보다 더 많다. 지피로 오고 가는 진출입로를 비롯하여 수색정찰 목적의 소로가 곳곳에 퍼져 있다. 그래서 이런 길의 현황이나 사정을 아는 근무 장병들이 맘을 먹으면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100~300m가량은 경계가 삼엄하다. 지뢰나 불발탄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군사분계선을 넘으려면 현지 지형을 비롯한 경계부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야 가능하다.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하천을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영을 할 줄 알거나 물에 뜨는 물건을 이용하면 땅으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보다 쉬웠다.


월북자 중 동료를 학살하고 넘어간 경우도 있었다. 조준희 일병 월북 사건이다. 1984년 6월26일 강원도 고성의 율곡부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까치봉 전방 지피에서 근무하던 조준희 일병이 동료 15명을 죽이고 북으로 넘어갔다. 끔찍한 사건이었다. 게임하듯이 동료 15명을 소총과 수류탄으로 학살했다. 그리고 지피 바로 앞을 흐르던 고성의 남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 조 일병을 추격하던 같은 부대 수색대원 3명도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지뢰를 밟아 죽었다. 정전 이후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사고 중 가장 참혹했다. 북의 침투나 도발로 인한 교전이 아닌 국군 내부의 총격이었다. 월북 이후 조 일병은 북한에서 훈장도 받고 간혹 북한의 매체에도 나왔다. ‘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사는 월북 대표선수’로 부각되었다. 조 일병은 월북 동기가 어떤 것이든 같이 생활하던 동료를 몰살한 살인자였다. 그런데도 조 일병은 ‘영웅’이 되었다. 전쟁을 거친 대립의 역사가 평화로 치유되지 못한 결과였다. 분단과 냉전이 얼마나 비정한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군인 중에는 미군도 있었다. 모두 6명이다. 1962년 5월 래리 앨런 앱셔 일병부터 1982년 8월 조지프 화이트 일병까지다. 이들은 모두 파주 일대에서 넘어갔다.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 이전까지는 서부전선 일부 지역의 경계작전을 미군이 담당했다. 1990년대 말까지는 판문점 근처의 지피를 미군이 직접 담당했다. 그래서 미군들도 마음만 먹으면 월북을 할 수 있었다. 찰스 로버트 젱킨스 하사가 대표적이다. 1965년 1월 술을 한잔 거하게 한 뒤 월북했다. 1960년대 서부전선에서 근무하던 미군들은 음주, 마약, 매춘이 일상이었다. 젱킨스 하사는 북에서 일본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려서 살았다. 2004년 북-일 수교협상 과정에서 아내의 나라인 일본으로 귀환해 살았다. 한때 일본에서 책도 발간하는 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일병도 유명하다. 1962년 8월, 무단외박을 한번 한 것을 두고 중대장이 군사재판에 회부하려 하자 홧김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국에서 제작한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다큐멘터리에 소개되기도 했다.



20사단 대대장 유운학의 월북에 

격노한 박정희, 재떨이 던져 

당시 담당 기무부대장 이학봉 

하나회 소속이어서 책임 면해


주한미군 중에서도 6명 넘어가 

국가가 보낸 북파·남파 공작원 

북한은 ‘공화국 영웅’으로 대우 

남한에서는 소모품으로 버려져


90년대 이후 급격히 줄어들어 

월북자 사라지고 간혹 귀순자만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이들은 주로 군인이었다. 민간인이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경우는 드물었다. 1995년 국방부가 밝힌 자료를 보면 월북 군인 수는 1953년부터 1995년까지 총 453명이었다. 1953년부터 1969년까지 월북한 군인은 391명이었다. 1970년에서 1979년까지 42명, 1980년에서 1989년까지는 17명, 1990년에서 1995년까지는 3명이었다. 현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한두명 넘어간 정도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부터는 국방부도 월북이나 무장탈영 등 장병들의 부대 이탈 사건을 쉬쉬하지는 않았다.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귀순자’의 정확한 통계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귀순자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환대해주었다. 2000년 이후부터는 귀순자에 대한 정부의 태도도 달라졌다. 생활대책을 비롯한 정착을 위한 지원은 하되,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국가가 쓰고 버린 사람들


국가의 명령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은 사람들도 있었다. 남파·북파 특수요원들이다. 이른바 특수임무를 띠고 적진을 염탐하거나 습격하기 위해 보낸 경우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너머까지 들어갔다. 주요 군사시설을 탐지하고 관찰하여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것부터 지피나 지오피의 주요 시설을 공격하는 것까지 여러 임무를 수행했다.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다.


북한은 1950년부터 1999년까지 총 6446명을 남파했다. 이 중 3177명이 생포됐고, 1644명이 사살됐다. 나머지는 도주하거나 기타 처리되었다. 남한은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총 7726명을 북파했다. 침투나 작전 과정에서 사망자로 확인된 것이 300명이었다. 이후 연락이 두절되어 생사를 알 수 없는 경우가 4849명이었다. 나머지는 부상자, 체포 또는 ‘기타’로 처리되었다.


북파와 남파는 남과 북 모두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다. 하지만 북한은 내부적으로는 ‘공화국 영웅’으로 칭하고 가족까지 보살폈다. 반면 남한은 보안이라는 이유로 쉬쉬했다. 보상금마저 주지 않았다. 정부는 2000년대 초반까지 북파공작원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철저히 외면했다. 남쪽이 더 비정했다.


북한의 남파는 전쟁 이후 수없이 듣고 보았다. 사살하거나 생포하면 남한 당국이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알렸다. 그래서 남파된 간첩과 ‘무장공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러나 북파는 2000년대 초반까지 철저한 기밀사항이고 금기였다. 그러다 2001년 전후부터 국회와 언론의 적극적인 문제 제기로 실체가 밝혀졌다. <한겨레>와 <문화방송>(MBC) 등 언론에서 북파공작원의 실상을 보도했다. 


특히 2002년 3월15일 전직 북파특수요원 300명가량이 광화문 한복판에서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프로판가스통에 불을 붙이며 진압 전경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들은 “우리도 인간이다”라며 자신들의 과거를 보상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북파공작원의 뒷일을 책임져야 했다. 그것이 국가고 정부다. 그러나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외면했다. ‘비밀 유지’는 변명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지원과 보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북파요원을 양성해 사선으로 보낸 사람들은 대부분 현직 군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마음속의 빚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2002년까지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문민정부를 거치면서 비무장지대를 오가는 사람도 적어졌다. 남파와 북파는 물론이고 월북도 거의 사라졌다. 간혹 탈북 인민군만 군사분계선을 넘어온다. 비무장지대의 ‘반역자’와 ‘영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전 65주년을 맞이하면서 비무장지대를 오가는 새 시대를 꿈꾼다.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평화적 수단으로 왕래하는 것을 기대한다





Posted by NOHIS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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